묵묵히 살아가는 당신에게 건네는 위로…연극 ‘바냐 삼촌’

연극 ‘바냐 삼촌’에서 허황한 과거에 사로잡힌 교수를 향해 분노를 표출하는 바냐(이서진)와 이를 말리는 소냐(고아성). 엘지아트센터 제공

“‘바냐 삼촌’을 너무 올드한 막장극 아니냐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연극을 보고 나선 ‘너무 현대적이고, 정말 요즘 얘기’라고 하더라. 내가 중년이다 보니 바냐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이서진)

“소냐를 연기하면서 그냥 어느 날, 어느 시대에나 인간에게 흔히 일어나는 일을 다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다른 배우의 대사를 들으면서 중년의 위기, 허탈감, 불안감이 절절히 와 닿았다.”(고아성)

지난 13일 서울 강서구 엘지아트센터에서 만난 두 배우는 자신들의 첫 연극 작품 ‘바냐 삼촌’에 대해 이렇게 입을 열었다. 130년 전 러시아 리얼리즘 거장 안톤 체호프가 쓴 고전을 손상규 연출이 각색한 연극의 주인공 바냐와 그 조카 소냐 역으로 무대에 섰는데, 대사 하나하나가 남 일 같지 않다는 것이다. 지난 7일 이곳에서 개막한 ‘바냐 삼촌’은 1899년 러시아에서 초연한 작품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지금 우리 이야기와 맞닿아 있다.

바냐는 죽은 여동생의 남편인 교수 세레브랴코프의 성공을 위해 평생 헌신하고, 영지를 관리했다. 하지만 은퇴 뒤 젊은 여인과 살며 허황한 꿈에 사로잡힌 교수를 보고 모든 게 헛수고였다는 걸 깨닫고, 상심하고 좌절하고 분노를 표출한다. “젊었을 때 나도 재능이 있었어. 지금은 너무 억울해. 내 시간, 기회를 다 날렸어.” 바냐의 넋두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관객은 숨을 죽였다. 특히 자신의 터전인 영지를 팔겠다는 교수의 말에 분개한 바냐가 치받는 대목은 온갖 수모를 견디며 버텼지만 멸시받는 신세가 된 중년의 삶을 대변하는 듯했다. “내 젊음 내 피땀…. 25년 동안 단 한번도 나에게 고맙다고 하지 않았어. 25년 동안 나는 두더지처럼 살았어. (…) 나도 너처럼 책만 읽었으면 도스토옙스키가 됐을 거야, 이 쓸모없는 인간아.”

연극 ‘바냐 삼촌’에서  늙고 잊혀져가는 자신의 설움과 분노를 쏟아내는 교수 세레브랴코프(김수현)와 그 젊은 부인 엘레나(이화정). 엘지아트센터 제공

이서진은 무심하게 대사를 툭툭 던지며 불평, 분노, 욕망을 표출하는 ‘생활 연기’로 깊은 몰입감을 선사했다. 그는 “평소 내 스타일대로 했는데, 연출이 ‘그게 딱 좋다. 그대로 가라’고 했다. 나도 가족을 책임진 사람으로 뭘 바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책임지고 살아가는 게 삶 아닌가 싶었고, 그걸 내 방식대로 표현했는데, 지인들은 ‘평소 너 같아서 아무것도 안 한 것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고 전했다.

극 중 소냐는 우리 시대의 누이 또는 청년처럼 그려진다. 아버지, 삼촌 등 모든 인물이 사모하는 아름다운 새어머니와 자신의 현실과 외모를 비교하며 자존감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가족의 화합을 위해 버텨내고, 모든 이를 끌어안는다. 고아성은 “소냐는 평범하지만 가족을 책임지는 굳건한 기둥 같은 인물이라 생각했다”고 했다.

소냐가 바냐에게 건네는 위로는 너무 강렬해 큰 울림을 준다. “그런데 어쩌겠어. 살아봐야지. 삼촌, 우리 살아보자. 모든 걸 묵묵히 견뎌내보자. 그러다 우리 마지막 순간이 오면, (…) 천국에 가서 이야기하자. 하루하루 버티느라 힘들었지. 괜찮아. 너는 정말 대단했어. 우리 삶이 얼마나 근사했는지 돌아보게 될 거야. 지금 우리에게 끔찍했던 거, 고통스러웠던 거, 우리도 우리 삶을 연민하며 따듯하게 볼 수 있게 될 거야.”

연극 ‘바냐 삼촌’에서  각자의 역할에 몰두하는 이들. 엘지아트센터 제공

조명이 꺼지고 막이 내려오면 관객들은 “인생 대사네” “이 연극, 이걸 말하고 싶었구나”라고 속삭인다. 고아성은 “원작은 따스한 위로가 아닌데, 연출과 얘기해 다정함을 가미했다. 요즘 사람에게 필요한 게 다정함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서진도 “관객이 소냐에게 위로받고 일상으로 돌아가 잘 살아가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극 중 교수의 삶에선 노인의 절망, 은퇴 이후 불안 심리를 읽어낼 수 있다. 영지로 돌아온 교수는 평생 뒷받침해온 이들의 노고엔 무관심하다. 자신이 누렸던 명성에 대한 상실감에 사로잡혀 넋두리하고 영광을 되살릴 허황된 꿈을 꿀 뿐이다. “늙으니까 하루하루가 지겹고 혐오스러워. 다른 사람도 내 모습이 역겹겠지? (…) 내가 이 나라 최고의 교수들과 있었는데. (…) 더 유명해지고 싶어.” 이런 그의 마음을 헤아리는 이 역시 노인인 극 중 유모다. “(노인은) 아이와 똑같아. 그냥 가엽게 봐주기를 바라는 건데.” 31일까지.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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