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살 방직공 ‘노조한 죄’ 징역살이…63살에 기어코 “무죄”

[길을 찾아서 - 장남수 노동의 문장] 23화 원풍 노조 44년 만의 재심

1982년 원풍모방 노조 강제해산 이후 출근 투쟁을 하다가 10개월 징역을 살았던 19살 방직공 차언년씨가 세월이 흐른 뒤 원풍동지회의 봄나들이에 참석했다. 장남수 제공

열아홉살 여공이 재판관의 제지를 무시하며 검사를 향해 질타했다.

“우리가 아니라 검사님 같은 분이 사회 불안을 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1982년 대한민국의 법정에서는 이런 장면이 펼쳐졌고 그는 실형을 받아 10개월 동안 구금되었다.

44년 뒤인 올해 5월 서울남부지방법원, 같은 법정에 63살 초로의 그가 다시 섰다. 이날 논고를 읽어나가던 재판장이 마지막 선고를 했다.

“무죄를 선고합니다.”

전방위적인 국가폭력에 의해 원풍모방 노조가 해산되고(8화 원풍모방 9·27 노조 파괴) 560여명을 거리로 내몬 폭압에 항의하다 구속되었던 차언년의 이야기다.

반세기를 거슬러 올라간 그 날, 닷새를 굶으며 농성하였으나 기어코 쫓겨 나온 원풍모방 노조원들은 출근하기 위해 공장 앞에 모였다. 부당한 각서를 거부하며 정문 앞으로 달리던 날, 197명이 연행되었고 두 사람이 구속되었다. 당시 기숙사 자치회 회장을 맡고 있던 27살 김숙자와 그중 가장 어렸던 19살 노조 대의원 차언년이었다.

1981년 가톨릭노동청년회전국지도자대회가 열린 전주 가톨릭회관에서 초청 공연에 나선 원풍모방 노조 탈춤반, 가운데 팔을 치켜 든 이가 당시 18살이었던 방직공 차언년씨. 장남수 제공

언년은 열네살에 원풍모방의 노무과 과장에게 소개비를 내고 세살 위인 친구 언니의 주민등록증을 제출했다. 면접 보는 날 어린 티를 감추느라 머리를 말고 굽 높은 구두를 신고 들어갔는데 마치고 나온 길에서 굽이 삐끗해 넘어지기도 했으나 입사에는 성공했다. 이런 경우가 적지 않아 노조가 회사와 협의해 이름을 찾아주기 전까지는 남의 이름으로 불렸다.

공장에 들어가니 비록 열명 넘게 한 방에서 생활할지라도 따뜻한 기숙사와 식당에서 세끼 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어 너무 좋았다. 남보다 배로 밥을 먹으면서도 배곯고 있을 동생들이 아른거렸다. 기숙사 강당에 텔레비전이 있어 행복했고 더운물이 펑펑 나오는 목욕탕이 있어 황홀했다. 월급을 받으면 빨랫비누 값만 남기고 모두 집에 보냈다. 오빠가 대학을 졸업하면 집안의 가난을 해결할 거라는 기대에 자신의 고생은 참을 수 있었다. 공장에서 장학금을 지급하는 고등공민학교에도 입학해 주말엔 교복을 입어 보았다. 야근조 근무 땐 아침에 등교하고 새벽반일 때는 저녁에 등교하며 밤 11시나 되어 기숙사에 들어왔다. 밤중에 식당에 가면 ‘밀쌀’이라 불리던 쌀로 스팀에 찐 밥이 식어서 푸석하게 말라 있고, 반찬은 단무지가 자주 나왔지만 먹어야 했다. 수요일 메뉴는 국수였는데 불어 터진 국수 가닥이 젓가락보다 굵었다.

학교 졸업 뒤에는 노동조합 탈춤반에 들어갔다. 힘 있게 춤 잘 춘다는 칭찬을 들으며 팔을 젓고 두 다리로 높이 뛰어올랐다. 노동조합이 있어 행복했고 희망이 생겼다. 야근도 소음도 먼지도 까짓것, 배고프고 외롭고 암담한 것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꿈을 품을 수 있는 노동은 언제까지라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국가가 앞서 노동조합을 파괴한 뒤 앞으로 복종하겠다는 각서를 요구했다. 경찰서에서도 감옥에서도 법정에서도 그는 말했다.

“우리는 잘못한 게 없어, 권력을 잘못 휘두르는 너희가 사회 불안이야.”

1982년 9월 원풍모방 노조가 강제해산 됐으나, 10월에도 노조원들의 출근 투쟁이 이어졌다. 그해 10월13일 출근 투쟁을 하던 197명이 연행되어 당시 19살 차언년씨와 27살 김숙자씨 2명이 구속됐다. 사진은 당시 연행 모습. 장남수 제공

매년 가을만 되면 언년은 마음이 가라앉는다. 1982년 9월 공장에서 무더기로 끌려 나온 뒤 출근하려고 몰려간 공장 앞에 철망이 촘촘한 경찰버스가 새카맣게 깔렸던 그해 10월의 풍경이 떠오른다. “경찰은 출근길을 막지 말라” 외쳤으나 그들은 철컥철컥 포위해 들어왔다. 해가 환히 떠오르는 도로에서 짐짝처럼 난폭하게 팽개쳐지던 장면, 경찰차에 타지 않으려고 서로의 몸을 부둥켜 당기며 몸부림치던 순간, 버스 바퀴 밑에 드러누우며 버티자 “죽어도 갯값도 못 받는다” 조롱하며 끌어내던 남자들, 경찰버스에 가득 실린 동료들의 울부짖음, 미성년자라고 따로 다른 취조실로 데려가서는 느닷없이 가슴을 움켜쥐던 그 ××, 이년이 뭘 잘했다고 소리 지르냐며 하루 종일 가두어 놓던 대기실, 쓰고 또 쓰게 하던 조사 과정, 불안하게 유치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동료 언니들, 구치소로 넘겨진 뒤 옷을 다 벗겨 수색하던 치욕들이 이어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날 경찰서를 가득 채운 동료 가운데 차언년 자신을 포함해 두명만 구속되고 나머지는 석방된 것과, 감옥은 깜깜한 곳인 줄 알았는데 전등불이 밝혀져 있던 것이라 했다. 죄명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이었고 10개월간 징역을 살았다.

석방된 뒤 고향에선 “빨갱이”가 되어 있었고 공장은 어느 곳도 취업하기 어려웠다. 국가가 만든 ‘블랙리스트’ 때문이었다. 동료들은 슬슬 피했고, 회사는 일감을 치워버리기 일쑤였다. 간난신고 끝에 입사에 성공한 제법 규모 있는 공장에서 다행히 1년이 넘게 탈 없이 다녔다. 그런데 위장 취업했던 대학생이 유인물을 뿌리다 해고를 당하는 일이 생긴 뒤 대대적인 신원조회가 이루어졌고 전력이 드러나자 회사는 사표를 내지 않는 그를 매일 전무실에 앉혀 두었다. 석달을 버티며 싸웠으나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마저 괴롭힘당하는 것을 보다 못해 포기하고 나와야 했다.

결혼 뒤 두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과 4학년일 때 남편은 암 치료 중에 세상을 떠났다. 장례지도사가 이렇게 어린 상주는 처음 본다고 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말하자면, 옛 어른들 말씀처럼 책으로 열권은 써도 다 못할 것이다.

1982년 9월 원풍노조 강제해산 사건이 발생하기 하루 전날 회사 공고판에는 느닷없이 박순애 부조합장과 이옥순 총무를 ‘사칙 위반’으로 해고한다는 게시물이 붙었다. 다음날 비상 회의 중인 노조 사무실에 장정들이 몰려와 조합장을 감금하고 구타하는 사건과 항의 농성이 이어졌고, 이후 간부들이 수배됐다. ‘해고’로 노동자 지위를 박탈한 뒤 ‘제3자 개입 위반’을 적용하는 등으로 방용석 박순희 정선순 박순애 양승화 이옥순 등 간부들이 구속되었다. 이것이 당시 대한민국의 사법 실태였다.

지난해 재심을 신청했다. 가장 먼저 구속되어 간부들보다 한달 더 수감 기간이 길었던 김숙자(71) 차언년(63)의 재판이 앞서 시작되었다. 법정에서 이들은 자꾸 먹먹해졌다. 최후 진술 때도 목이 잠겨버린 김숙자는 적어 간 글을 입안으로만 외웠다.

“출소 이후 정상적인 취업이 불가능했으며, 경찰의 감시와 압박에 떠밀리듯 결혼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시댁까지 동향 조사하러 온 경찰에 의해 빨갱이란 오명을 쓰고 쫓겨나 어린 자녀들과 생이별했습니다. 이후 몇번이나 극단적 시도를 했을 정도로 삶은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평생을 억울함과 우울증, 대인기피증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보호해야 할 국민에게 국가가 가한 이 모든 잘못에 대해 이제라도 진실이 밝혀지기를 원합니다. 본인이 잘못하지 않았음을 인정받고 잃어버린 명예를 회복할 수 있도록 재판부의 현명한 판결을 간절히 바랍니다.”

차언년도 마찬가지로, 판사가 이름을 불러도 주소를 물어도 이상하게 자꾸 눈물이 나왔다. 44년 전의 풍경이 눈 안에 차올랐다.

2026년 5월13일, 법정은 이들 말고도 사건이 많았다. 앞 차례의 사건들을 진행하며 별 표정이 없던 재판장이 김숙자와 차언년을 호명할 때는 다르다고 언년은 느꼈다. 유죄를 고집한다면 그런 표정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주문의 마지막 문장이 떨어졌다.

“무죄를 선고합니다.”

순간, “판사님!” 큰소리로 차언년이 불렀다.

“잘못된 걸 바로잡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법정에 함께한 원풍동지회 회원들의 입도 동시에 터졌다.

“고맙습니다.”

비로소 ‘신성한’ 법정이었다. 재판장도 빙그레 웃었다.

장남수 | 경남 밀양 출생. 1958년생으로 열여섯살부터 공장에서 일하며 신정야학에서 공부했다. 원풍모방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 해고된 뒤 노동운동을 하며 글을 써왔다. 늦깎이로 검정고시를 거쳐 성공회대에서 공부했다. 지금은 제주도에 살면서 걷고 배우며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다. 1984년 ‘빼앗긴 일터’를 시작으로 ‘빼앗긴 일터, 그 후’ ‘파문’ ‘노동의 시간이 문장이 되었기에’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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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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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사람#f16L
    2026.05.1909:37
    진짜 억울한 인생을 살아 오셨네요. ㅠㅠ 국가로부터 보상은 받았습니까?
  • 카오스#cFyv
    2026.05.1909:00
    천년전꺼 얘기해라.
    • 와썹#5Max
      2026.05.1909:18
      ㄱㅅ야 평생을 밟히며 저리 살아온 사람에겐 현재다 니가 직장생활을 했다면 하고 있다면 저 분들의 희생을 깔고 있는 거란 걸 알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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