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마’가 지운 범죄의 본질 [한겨레 프리즘]

고등학생을 살해한 장윤기씨가 지난 7일 광주지법에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친 뒤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혁준 | 전국팀장

어린이날 새벽 길거리에서 마주친 모르는 여자 고등학생을 살해한 장윤기(23)의 신상이 지난 14일 공개됐다. 이날 여러 언론이 ‘광주 묻지마 살인 피의자 신상 공개’ ‘여고생 묻지마 살인범 신상 공개’ 같은 제목으로 기사를 내보냈다. 우리 사회와 언론은 강력 범죄를 마주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묻지마’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한다. ‘묻지마 범죄’는 ‘우발적 범죄’처럼 우연히 일어났다는 뜻을 내포한다. 아무 이유 없이 벌어진 범죄처럼 보이게 한다. 그래서 사건 본질을 설명하기엔 부정확한 표현이다.

이번 고등학생 살해 사건은 ‘묻지마’라는 단어가 얼마나 범죄의 본질을 왜곡하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가해자는 “살기 싫어 자살을 결심한 뒤 거리를 배회하다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하지만, 수사 결과는 전혀 다르다. 가해자는 아르바이트하다 알게 된 외국인 여성에게 교제를 거절당하자 상대 집에서 성폭행을 저질렀고, 이 여성을 살해하려고 흉기를 구매해 30시간 이상 거리를 배회했다. 이후 자신보다 약한 여고생을 포착하고 15분간 미행한 뒤 범행을 저질렀다. 범행 직후에는 피 묻은 옷을 무인 세탁소에서 세탁하고 도망가며 치밀한 증거 인멸까지 시도했다.

‘우발적인 범죄’가 아니었다. ‘이유 없는 범죄’도 아니었다. 특정 대상을 노렸으나 실패하자 약한 피해자를 찾아 미행하고 인적이 드문 범행 장소까지 미리 선택한 정황은, 무의미한 광기나 우연이 아님을 보여준다. 분노를 무고한 타인에게 쏟아부으려는 복수심과 치밀한 계획이 결합한 범죄였다. ‘묻지마’라는 표현은 이런 맥락을 지워버리고, 사건을 단순한 개인의 광기나 불운으로 환원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피해자와 가족에겐 ‘묻지마’라는 말은 더없이 잔인한 언어폭력이다. 소중한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이유는 묻지 말고 그저 얄궂은 운명으로 받아들이라”는 비정한 느낌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도 치유되지 않을 상처에 ‘이유 없는 죽음’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것은 제2의 가해와 다름없다.

범죄를 명확히 규정하지 못하는 모호한 ‘묻지마’는 시민에게도 막연한 공포만을 심어줄 뿐이다. 이유 없는 폭력이라는 섣부른 인식은 “누구나 언제든 당할 수 있다”는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누구나 타깃이 될 수 있다는 공포는 사회적 신뢰를 무너뜨린다.

뒤틀린 분노를 제어하지 못한 가해자가 자신보다 약자인 대상을 골라 화풀이를 한 ‘이상 동기 범죄’가 이 사건의 정확한 본질이다. ‘동기가 비정상적일 뿐, 동기가 존재한다’는 얘기다. 동기가 있다면 추적할 수 있고, 추적할 수 있다면 예방책을 세울 수 있다. 해서 범죄 동기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단어가 필요하다. 범죄 동기가 ‘약자를 향한 분풀이’와 ‘스토킹 연장선’에 있음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름 짓는 것은 치안 시스템의 구멍을 찾아내고 실질적인 예방책을 마련하는 첫걸음이 된다.

이를 ‘묻지마’라는 모호한 안개에 가두는 순간 가해자의 범행 동기는 교묘히 희석되고, 피해자는 마치 운이 없어 사고를 당한 것처럼 본질이 가려진다. 결과적으론 가해자가 저지른 범죄에 면죄부를 주는 결과를 낳는다. 부정확한 언어는 부정확한 사회적 이해를 낳고, 부정확한 대응으로 이어진다. ‘묻지마’라는 익숙한 표현을 내려놓는 일은 불편하지만 필요한 선택이다.

언어는 인간 사고를 지배한다. 범죄를 대하는 태도는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에서 시작한다. 가해자의 잔혹하고 비겁한 변명을 ‘얄궂은 우연’이나 ‘이유 없는 광기’로 포장해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와 언론은 사건을 쉽게 부르기 위해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되물어야 한다. 억울하게 희생된 피해자의 명예를 지키고, 아이를 잃은 고통에 눈물 흘리는 유가족에게 우리 사회가 보여줄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다. 자극적인 이름 짓기 대신 정확한 이름 짓기가 필요할 때다. 그것이 반복되는 비극을 줄이기 위한 최소한의 출발점이다.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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