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채윤 |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며칠 전 참가한 마라톤 대회, 수천명이 함께 뛰는 가운데 눈에 띄는 모습이 있었다. 혼인 평등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동성 결혼’이라 적힌 몸자보를 붙이고, 한 손엔 부케를 머리엔 작은 웨딩 베일을 쓴 채 달리는 동성 커플이었다. 귀엽고도 멋졌다. 응원하는 마음으로 뒤따라가는데 갑자기 옆에서 날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건 또 뭐야? 꼭 저래야 해? 역겹다. 저딴 건 빨리 사라졌으면 좋겠어.” 고개를 돌리니 젊은 남녀 무리의 손가락질이 보였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성평등을 염원하며 열리는 대회에서 자신들의 편협함을 이토록 무례하게 드러내다니. 맞받아쳐 싸우려다가 참았다. 괜한 소란은 캠페인에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이미 사랑과 평등의 메시지는 혐오를 내뱉는 이들보다 훨씬 앞서 달리고 있었으니까.
마라톤 대회에서 웨딩런은 종종 열리는 이벤트다. 결혼을 앞둔 남녀가 예복 차림으로 달릴 때 축복이 쏟아진다. 이렇게 보면 동성 커플의 웨딩런도 딱히 눈총받을 유난은 아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토록 못마땅했을까. 정작 사라져야 할 것은 이성애자만 결혼해야 한다는 독점욕과 이성애만이 정상이라는 오만, 그리고 타인의 존재 자체를 지우려는 혐오다.
우리는 흔히 이성애를 인류가 지켜온 유구한 규범이라 믿는다. 그러나 이성애를 뜻하는 ‘헤테로섹슈얼리티’라는 단어가 인류 역사에 등장한 건 겨우 19세기 말이다. 당시 의학자들은 종족 보존에 부응하지 않는 모든 성행위와 욕구를 ‘변태’로 보았고, 이에 따라 이성을 향한 끌림조차 문제로 다루었다. 미국의 메리엄 웹스터 사전만 봐도 1923년에 이 단어가 처음 등재될 때의 정의는 놀랍게도 ‘이성을 향한 비정상적인 욕구’였다. 그러다 1934년 판부터 ‘이성에 관한 정상적인 성적 열정’으로 슬그머니 그 뜻이 바뀐다.
역사학자들이 이성애를 ‘20세기의 발명품’이라 부른다. 이는 20세기 이전에는 남녀 간의 사랑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는 특권을 가진 정체성이 사회적·의학적 기획으로 새롭게 만들어졌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이성애의 ‘정상성’은 동성애를 비정상으로 낙인찍으며 세워진 성벽과 같다.
사랑하는 대상의 ‘성별’을 기준으로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면 ‘어떻게’ 사랑할 것이냐는 본질적 질문은 설 자리를 잃는다. 동성애가 아니기만 하면 이성애 안에서 일어나는 여성 비하나 폭력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은 착시가 생긴다. 곧 국내 출간을 앞둔 제인 워드의 저서 ‘이성애의 비극’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든다. 워드는 현대의 이성애 문화가 남녀 간의 이분법적 차이와 불평등을 전제로 설계되었기에, 오히려 이성애자가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데 고통을 겪는다고 통탄한다. 혐오를 동력 삼아 쌓아 올린 ‘정상성’ 안에서 정작 사랑은 메말라가는 셈이다.
5월은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이 있어 ‘사랑과 감사의 달’이라고 한다. 우연의 일치일까. 마침 5월17일은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IDAHOBIT)이다. 1990년에 세계보건기구(WHO)가 동성애를 정신질환 목록에서 삭제한 것을 기념하여 제정되었다. 동성애가 ‘발명된 비정상’이었음이 마침내 드러난 날이기도 하다. 그러니 다정함이 넘쳐날 5월에 누군가가 성소수자라는 사실이 축하와 감사와 사랑을 나누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하자. 새로운 시대로 성큼 달려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