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후의 정확한 위로
상대 응징해줄 ‘내 편’ 만들려고
공감과 경청 구하는 사람들
변화의 시작은 ‘내 책임’ 인식

대학 동기였던 친구는 만나자마자 30분간 속사포처럼 주변 사람들에 대한 분노를 쏟아내는 게 일종의 ‘인사’였다. 카페 의자에 앉기도 전에 “글쎄, 내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겪었잖아!”라며 시작한 대화는 옆자리 동료와 상사, 남편과 시가, 친정 부모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졌다. 그의 동료는 무능했고 상사는 비도덕적이었으며, 회사는 부당했다. 남편은 이기적이고 시댁은 가부장적이며 친정은 의존적이었다. 이들을 문제 삼을 일이 없는 날에는 방금 타고 온 택시 기사라도 비난해야 했다. 택시 기사들은 늘 난폭 운전자이거나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자연스레 대학 동기들은 하나둘씩 그 친구와 멀어졌다. 이른바 엠비티아이(MBTI)의 에프(F) 유형 친구들은 그의 이야기를 공감하며 들어주다 지쳐서 슬슬 피하기 시작했다. 티(T) 유형 친구들은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지” “왜 그렇게 매사에 부정적이야?” “그렇게 힘들면 다 그만둬”라고 ‘정론직필’했다가 모두 손절당했다.
어딜 가나 하나에서 열까지 분노를 쏟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상담심리학에서는 공감과 수용, 경청의 미덕을 강조한다. 칼 로저스의 인간중심상담은 내담자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공감해주기만 해도 많은 내담자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한다고 말한다.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의 베스트셀러 ‘당신이 옳다’ 역시 온몸을 실어 공감해줄 때 한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고 회복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심리상담을 공부하고 있는 나에게 “어떻게 해야 상대에게 더 효과적으로 공감해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상대를 진심으로 위로해줄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신 “도대체 언제까지 공감해줘야 하나요?” “계속 공감해주니까 상대를 더 망치는 것 같아요” “들어줄수록 끝이 없는 하소연을 막을 방법은 없나요?”라고 묻는 사람은 많다.
우리는 어디까지, 또 언제까지 공감해줘야 할까? 자녀에 대해서는 명확하다. ‘감정은 공감해주되, 행동은 훈육하라’가 대원칙이다. 자녀가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거나 불평불만을 말할 때 “네 입장에서는 그런 마음이 들겠구나” “충분히 짜증이 날 수 있겠네” “나라도 화가 났을 것 같아”라며 감정은 수용해주되, 문을 쾅 닫거나 물건을 집어 던지거나 욕설을 하는 등 감정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엄격히 제지하고 단호하게 가르쳐야 한다. 이것을 ‘감정코칭’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부모에게 감정코칭을 받으며 자란 아이들 대부분은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적절하게 조절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성인의 경우에는 공감과 수용, 경청의 힘이 작동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누군가는 상대의 공감을 통해 마음을 회복하고 새로운 길로 나아가지만, 누군가는 공감을 받을수록 더 많은 불평불만을 가져온다.
무엇이 그 차이를 만들어낼까? 그 갈림길에 ‘책임감’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관계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고 100% 상대방의 잘못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래도 나에게 뭔가 책임이 있지 않을까?’ ‘내가 어떻게 하면 앞으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을까?’라고 묻는 사람도 있다.
물론 관계에 문제가 생겼을 때 자기본위적이고 자기보호적으로 사건을 해석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하지만 성숙한 사람들은 초기의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자신의 책임을 묻기 시작한다. 그리고 타인의 행동과 태도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임을 인정하고, 유일하게 통제가능한 자신의 행동과 태도를 좀 더 건설적으로 바꾸는 데 집중한다. 실존주의 상담가인 어빈 얄롬이 “비난이 끝나고 책임이 떠오를 때 치료는 시작된다”라고 말한 맥락이기도 하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자신의 무결점과 무오류를 확인하고, 상대를 함께 응징해줄 편을 만들기 위해 공감과 수용을 구한다. 자신을 ‘순연한 피해자’로만 확신하는 사람들은 애초부터 상대의 의견이나 생각에는 관심이 없다. 오직 ‘내가 옳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도구로서만 상대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그는 문제가 생길 때마다 자신의 옳음을 확인해준 그 사람을 다시 찾아가 또다시 공감을 구한다.
그렇다면 이들의 억울함에 귀 기울이고 공감을 건넨 사람들은 어떤 경험을 하게 될까. 처음에는 상대의 억울함을 들어주고 함께 화를 내준다. 다른 관점을 제시하며 문제를 해결해 보려 하기도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닫는다. 자신의 공감도 조언도 상대의 마음을 바꾸지 못하며, 다음 만남에서도 똑같은 이야기를 듣게 되리라는 것을. 그때부터 공감은 피로가 되고, 위로는 의무가 되며, 만남은 부담이 된다.
물론 한쪽이 100% 가해자이고 다른 한쪽이 100% 피해자인 사건도 있다. 하지만 가정과 회사에서, 동료와 친구 사이에서 발생하는 일 중에 그렇게 일도양단할 수 있는 일은 드물다. 우리는 각자 서 있는 위치에서 각자의 신발을 신고, 각자의 눈에 보이는 풍경이 옳다고 주장할 뿐이다.
그래서 ‘어디까지 공감해줘야 할까요?’라는 질문에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그가 분노하는 대상이 늘 타인에게만 향한다면, 공감은 ‘구멍 난 독에 물 붓기’일 뿐이다. 충분히 공감해준 뒤에도 매번 “역시 그 사람이 문제였군요”라는 결론으로 끝난다면, 공감은 그 사람의 삶을 바꾸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 채 같은 자리를 맴돌 뿐이다.
하지만, 충분한 공감이 성찰과 변화로 이어진다면, 우리의 위로와 공감은 충분한 값어치가 있다. 그것이 칼 로저스의 인간중심상담이 오늘날에도 중요한 상담 접근으로 평가받는 이유다.

자유기고가 김이후 afterthislife@n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