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대미술로서 한국화를 새롭게 자리매김 해 온 김선두 작가의 개인전이 11월 28일까지 연희동 황창배 미술관에서 열린다. 익숙한 시선을 흔들어 새로운 감각을 발생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들뢰즈가 ‘감각의 논리’에서 회화가 대상의 외형을 재현하는 것을 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감각하게 하는 방식이라는 점을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별은 낮에도 존재한다. 그러나 밝은 빛에 익숙해진 눈은 그 존재를 알아보지 못한다. 김선두의 ‘낮별’은 이 일상적인 사실에서 출발해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에 질문을 던진다. 무엇이 보이지 않는가에 앞서, 우리는 어떤 조건 속에서 보고 있는가.

이미지가 갈수록 선명해지는 시대에 우리의 시선은 상품과 광고, 익숙한 기호를 빠르게 식별하는 데 길들여진다. 대상을 알아보는 속도는 빨라지지만, 그 존재를 충분히 경험할 시간은 짧아진다. 이때 김선두의 회화는 익숙한 대상의 크기와 관계를 바꾸어 시선의 자동적인 움직임을 멈추게 한다.

들뢰즈의 감각에 대한 사유를 빌리면, 이러한 화면은 무엇이 그려졌는지 해독하는 동시에 선과 색이 몸에 어떤 움직임을 일으키는지 경험하는 자리다. 꽃은 꽃이라는 이름으로 이해되지만, 그림 앞에서 마주하는 것은 그 이름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무게와 팽창, 뒤틀림과 긴장이다.

‘낮별-도도한 난초’의 분홍빛 꽃은 화면 상단을 압도할 만큼 크게 펼쳐진다. 굵은 먹선이 꽃잎을 가르고, 불규칙한 곡선들이 안쪽으로 겹쳐진다. 주름진 표면은 살갗을 연상시키고, 가느다란 줄기는 커다란 꽃의 무게를 받치는 듯하다. 관객은 식물의 외형을 바라보면서 그 몸을 밀어 올리고 아래로 끌어당기는 힘까지 느끼게 된다. 생명은 이처럼 화면 안에서 압력과 리듬으로 감각된다.
꽃 아래로 휘어진 잎들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뻗는다. 활짝 핀 부분과 말라가는 부분이 하나의 몸에 연결되면서 식물은 완성된 형태에 머물지 않는다. 성장과 쇠락이 동시에 진행되는 과정으로 나타난다. 들뢰즈의 ‘생성’이라는 관점에서 읽을 때, 이 식물의 존재는 고정된 정체성보다 계속 달라지는 상태와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 아름다움 역시 가장 완벽하게 피어난 한순간을 넘어 변화하는 몸 전체에 걸쳐 형성된다.
오른쪽 가장자리에는 과자봉지 속 여성의 얼굴과 글자, 선명한 색채의 무늬가 보인다. 작은 새는 그 가까이 자리한다. 식물과 새, 상품의 기호가 만나는 이 화면에서는 자연과 문명이 명확한 구획을 유지하기 어렵다. 서로 다른 존재와 이미지가 크기와 위치, 색의 관계를 통해 하나의 장면을 만든다.

이러한 관계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배치’ 개념을 통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다. 배치는 서로 다른 요소가 만나 어떤 작용을 만들어내는 관계를 뜻한다. 작품 속 꽃과 새, 과자봉지이미지는 각자의 상징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서로의 보이는 방식을 바꾼다. 광고 속 얼굴은 커다란 꽃에 가려지고, 일상의 화분은 화면을 지배하는 존재가 된다. 시각적 관심의 순서가 재편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비판성은 소비사회를 고발하는 메시지에만 있지 않다. 무엇에 먼저 주목하고 무엇을 배경으로 밀어내는지, 그 습관 자체를 흔드는 데 있다. ‘낮별’을 발견하는 일도 이미 알고 있던 가치를 확인하는 데서 나아가, 곁에 있는 존재를 이전과 다르게 경험하는 일이 된다.

‘밤길’ 연작에서는 이러한 시선의 변화가 걸음의 문제로 이어진다. 밤길을 걷는 사람에게 보름달은 모든 것을 명확히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지나온 자리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어렴풋이 가늠하게 한다. 길을 안다는 것은 전체 경로를 완전히 파악하는 일보다, 기억과 주변의 빛에 의지하며 다음 걸음을 조정하는 경험에 가까워진다.

‘낮별’의 강한 빛과 ‘밤길’의 은은한 달빛은 서로 다른 가시성의 조건을 만든다. 같은 세계도 어떤 빛과 관계 속에 놓이는가에 따라 다르게 드러난다. 김선두의 개인전 ‘별에 대하여’는 이러한 차이를 통해 보는 행위 자체를 다시 경험하게 한다. 더 많은 이미지가 눈앞에 주어지는 시대에, 회화는 익숙한 시선에 작은 틈을 내고 그 사이로 다른 생명의 리듬이 들어오게 한다.
생명의 시학이다. 시각적 자극과 상업적 기호가 과잉 공급되는 고해상도(High-Resolution) 현대 사회에서, 김선두 '낮별' 연작은 매혹적이면서도 예리한 비판적 질문을 던진다. 눈앞의 화려한 현상에 가려져 정작 우리가 놓치고 있는 삶의 본질은 무엇인가?
현대미술에서 ‘보임’은 자본과 미디어가 주도하는 권력의 상징이다. 매초 감각을 압도하는 스펙터클의 시대 속에서 김선두는 역설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을 화면 중앙으로 호출한다.
작가는 낮하늘의 별을 두고 "아침 태양이라는 거대한 현상에 잠시 가려져 있을 뿐, 늘 그 자리를 지키는 영원한 생명의 숨결이자 존재의 본질"이라 설명한다. 이는 눈이 멀 듯 화려한 일상의 욕망에 시각을 빼앗긴 현대인들에게, 보이지 않지만 언제나 우리 곁에 존재하는 가치—소박한 삶, 유년의 기억, 그리고 존재 자체의 소중함—를 되찾아올 것을 제안하는 성찰적 메세지다.
작가가 구축한 화면은 현실을 도피한 순수한 유토피아가 아니다. 화분 속 맨드라미와 옥수수, 파초 사이로 ‘나쵸(Nacho)’ 과자 봉지와 ‘코카콜라’ 캔, 상업 광고 캐릭터가 스스럼없이 침투한다.

이러한 자연물과 인공적 소비재의 ‘불협화음적 병치’는 당대 문명에 대한 생생한 비판적 장치다. 작품 속 참새와 곤충들은 당장 눈앞에 떨어진 과자 부스러기에 열중하느라 머리 위에 수놓아진 우주적 별빛을 보지 못한다. 이는 일회성 소비 욕망과 자본의 굴레에 매몰되어 삶의 숭고한 질서를 잊고 살아가는 현대인의 초상을 위트 있으면서도 다소 씁쓸하게 고발한다.
김선두 미학의 단단함은 매체의 물질성과 우직한 노동에서 완성된다. 캔버스 위에 물감을 덮어 칠하는 서구적 방식과 달리, 작가는 두꺼운 장지(壯紙)에 먹과 분채를 수십 번 우려내며 색을 겹겹이 스며들게 하는 방식을 취한다. 속도와 효율을 신봉하는 당대 사회의 흐름에 맞서, 우직하게 쌓아 올린 ‘시간의 지층’은 화면 속 미물들에게 거친 생명력의 질감을 불어넣는다.
김선두 작가에게 예술이란 전에 없던 화려한 신세계를 발명하는 기술적 혁신이 아니다. 그것은 “현상이라는 강렬한 빛에 가려졌던 오래된 삶의 길을 다시 거닐 수 있게 만드는 생명의 회복”이다.
길가의 잡초와 미물, 자본주의의 찌꺼기, 그리고 밤하늘의 별들이 한 화면에서 교차하는 그의 작품은 황홀하면서도 누추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단호히 묻는다. 지금 당신의 눈을 가리고 있는 ‘낮의 빛’은 무엇이며, 당신이 잊고 있던 ‘낮별’은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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