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전기가 엔비디아에 인공지능(AI) 반도체용 첨단 패키지기판을 다년간 공급하기로 하고, 국내 생산시설에 양사가 공동 투자하는 등 장기 공급 협력에 나선다.
삼성전기는 21일 엔비디아와 전략적 비즈니스 파트너십을 맺었다고 밝혔다. 엔비디아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연례 개발자 행사 'GTC 2026'에서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의 기조연설이 끝난 뒤 이를 공식 발표했다. 그간 양사 거래는 업계를 통해 알려져 왔으나 엔비디아가 삼성전기와의 협력을 공식화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양사는 공동 투자로 삼성전기 세종·부산 사업장에 AI 반도체 패키지기판 전용 생산라인을 증설한다. 삼성전기는 이를 기반으로 올해부터 다년간 엔비디아에 AI 연산 칩셋용 기판과 데이터센터 내 칩 간 초고속 연결을 담당하는 네트워크(스위치)용 패키지기판을 공급한다.
엔비디아 공급 물량은 올해를 기점으로 연평균 두 자릿수 이상 늘어 2028년에는 삼성전기 전체 패키지기판 생산능력의 상당 부분을 차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계약 금액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업계 일각에서는 FC-BGA 단일 거래로는 역대 최대인 수조원대로 보고 있다.
공급 제품은 플립칩 볼그리드 어레이(FC-BGA)다. FC-BGA는 그래픽처리장치(GPU)·중앙처리장치(CPU)·AI 가속기 등 고성능 반도체와 메인보드를 연결해 전기신호와 전력을 전달하는 기판이다. AI 반도체가 고성능화하면서 기판이 넓어지고 층수가 늘어 초미세 회로 구현과 열에 따른 휨 억제 기술이 중요해졌다. 서버용 FC-BGA는 PC용보다 면적이 4배 이상 크고 층수도 20층 이상으로 2배 넘게 높아 만들 수 있는 업체가 손에 꼽힌다. 삼성전기는 전력 잡음을 줄이기 위해 적층세라믹커패시터(MLCC)와 실리콘 커패시터를 기판 안에 내장하는 고난도 공정을 적용해 경쟁력을 높인다는 계획이다.
삼성전기는 이미 엔비디아 공급망에 발을 들인 상태였다. 엔비디아 'NV스위치'용 FC-BGA를 양산하고 있고, 올해 들어서는 차세대 플랫폼 '베라 루빈'에 들어가는 추론 전용 칩 '그록3 언어처리장치(LPU)'용 FC-BGA의 주요 공급사 지위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협력으로 공급 범위가 엔비디아의 핵심인 연산 칩셋용 기판까지 넓어지게 됐다.
장덕현 삼성전기 사장은 "글로벌 AI 혁신을 이끄는 엔비디아의 핵심 인프라 파트너로 동참하게 되어 뜻깊게 생각한다"며 "첨단 FC-BGA 제조 경쟁력과 고신뢰성 MLCC 기술력을 결합해 엔비디아의 AI 플랫폼이 최고의 성능과 품질로 시장에 적시 공급될 수 있도록 토탈 설루션 공급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데보라 쇼퀴스트 엔비디아 운영담당 부사장도 이번 협력으로 기판 공급 파트너망을 넓히고 생산능력을 추가 확보하게 됐다고 밝혔다.

장기계약 잇따라…기판 사업 체질 개선
삼성전기는 패키지기판 사업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달 28일 이사회에서 세종사업장 FC-BGA 생산능력 확대에 4조2700억원을 투자하기로 했고, 이달 19일에는 글로벌 대형 고객사와 3605억원 규모의 메모리 반도체용 패키지기판 장기공급계약(LTA)을 맺었다. 이로써 5월 이후 공시 기준 장기공급계약은 7건, 누적 계약액은 4조3000억원으로 늘었다. 경기 흐름에 따라 실적이 출렁이던 기판 사업을 장기계약 중심의 안정적인 고수익 구조로 바꾸겠다는 전략이다.
패키지솔루션사업부의 2분기 매출은 AI 서버·네트워크용 고부가 기판 공급 확대에 힘입어 1년 전보다 37% 늘어난 7716억원을 기록했다. 삼성전기는 2022년 국내 최초로 서버용 FC-BGA 양산에 나섰고 부산·세종과 베트남을 생산거점으로 두고 있다. 메리츠증권은 4월 보고서에서 삼성전기가 실리콘 커패시터와 아지노모토빌드업필름(ABF·고성능 기판용 절연소재) 기판을 동시에 공급할 수 있는 유일한 사업구조를 갖췄다고 평가했다.
'이비덴 독점' 깨지나…빅테크 기판 확보전
그동안 엔비디아 AI GPU용 FC-BGA는 일본 이비덴이 사실상 독점 공급해 왔다. 이비덴은 호퍼부터 블랙웰, 차세대 루빈까지 엔비디아 GPU 전반에 기판을 대고 있다. 글로벌 FC-BGA 시장 역시 이비덴과 신코덴키(일본), 유니마이크론(대만), 삼성전기 등 소수 업체가 과점해 왔다.
엔비디아로서는 이번 협력으로 이비덴에 쏠린 기판 공급망을 분산해 공급 병목을 완화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가와시마 고지 이비덴 사장은 고객들이 확보 가능한 물량을 모두 가져가고 있어 건설 중인 신공장 용량으로도 부족할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기판 품귀는 엔비디아만의 문제가 아니다. 구글·아마존·메타·마이크로소프트(MS) 등이 자체 설계한 주문형 반도체(ASIC)가 FC-BGA의 새 수요처로 떠올랐고, AMD도 AI 가속기 'MI300'·'MI400'에 삼성전기 기판을 쓰고 있으며 테슬라도 고객사다.
삼성전기는 2분기부터 북미 신규 빅테크 고객사에 데이터센터 네트워크용 FC-BGA 공급도 시작했다. KB증권은 올해 3분기 글로벌 빅테크의 메모리·AI 기판 수요 충족률이 60~70%에 그친다고 분석했다. 신규 생산라인 완공에 최소 2~3년이 걸리는 만큼 공급 부족이 2028년까지 이어질 것이란 관측이다.
공급사들은 증설 경쟁에 뛰어들었다. 이비덴은 2026~2028년 3년간 AI 서버용 기판을 중심으로 5000억엔(약 4조7000억원)을 투자하기로 했고, 유니마이크론은 올해 설비투자를 30% 이상 늘린 약 1조1700억원(254억대만달러)으로 잡았다.
LG이노텍도 빅테크 2곳과 증설을 협의하며 현재 500억원 수준인 FC-BGA 매출을 2030년 1조원 이상으로 키운다는 목표다. 일본 후지키메라연구소는 글로벌 FC-BGA 시장이 2022년 80억달러에서 2030년 164억달러로 두 배 넘게 커질 것으로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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