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마트폰 카메라 모듈 시장의 주요 공급사인 LG이노텍이, 일본 이비덴(IBIDEN) 등 선발 업체들이 선점해온 고성능 반도체 패키지 기판(FC-BGA) 시장으로 사업 다각화를 추진하고 있다.
LG이노텍은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과 장기공급계약(LTA) 체결을 위해 협상을 전개 중이며, 해당 기판은 반도체 칩을 미세한 공 모양의 돌기로 연결해 신호 속도를 극대화한 고성능 부품이다.
이는 완제품용 미세 부품에 집중돼 있던 사업 포트폴리오를 반도체 핵심 부품 영역으로 확장하려는 전략이다.
선발 주자와의 기술 격차를 극복해야 하는 과제가 있지만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의 공급망 다변화 수요가 맞물리면서 시장 진입의 기회가 형성됐다.
LG이노텍은 소비자가 직접 사용하는 스마트폰의 카메라 렌즈와 센서를 통합한 외형 부품인 카메라 모듈 시장에서 글로벌 수준의 정밀 대량 양산 역량을 검증받으며 성장해 왔다.
반면 이비덴은 컴퓨터의 연산을 담당하는 핵심 칩(CPU·GPU)을 구동하는 데 필수적인 고성능 반도체 패키지 기판 부문에서 30년 이상 역량을 집중하며 글로벌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반도체 패키지 기판은 실리콘으로 만든 미세한 반도체 칩을 컴퓨터 메인보드에 안정적으로 연결해 주는 ‘전기적 신경망’ 역할을 한다.
이비덴은 인텔(Intel) 등 글로벌 반도체 설계 기업들과 초기 설계 단계부터 협력하며, 미세 칩과 대형 메인보드 간의 신호 전달 체계를 최적화해 주는 고부가 기판 시장의 선두 자리를 유지 중이다.
21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LG이노텍은 올 연말까지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의 공급망 내에 제2 공급사(기존 독점 공급처 외에 리스크 분산을 위해 추가로 지정하는 두 번째 협력사)로 공식 진입한다는 전략적 목표를 수립하고, 고부가 패키지 기판 수주를 위한 계약 협상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는 지난 2022년 2월 FC-BGA 시장 투자를 공식 선언한 이후 구축해 온 양산 인프라와 기술력이 바탕이 됐다.
현재 반도체 패키지 기판 부문에서는 이비덴이 오랜 양산 경험을 통한 수율 안정화와 시장 점유율 면에서 앞서 있다는 게 업계 일반적인 평가다.
고성능 반도체 기판은 전기 신호가 지나가는 미세 회로를 수십 층씩 정밀하게 쌓아 올리는 물리적 적층 공정이 필수적이므로, 대량 양산 과정에서 오차를 줄이는 숙련도가 핵심 경쟁력이다.
이비덴은 이러한 기술적 축적과 글로벌 고객사들과의 탄탄한 파트너십을 바탕으로 장기 공급 물량을 상당 부분 선점해 왔다.
후발주자인 LG이노텍은 초기 공정 안정화 단계를 거치며 기술 격차를 좁히는 데 주력하는 중이다.
하지만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증설에 나선 엔비디아(NVIDIA), 마이크로소프트(MS) 등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특정 제조사에만 핵심 부품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공급망 리스크를 완화하기 위해 공급처 다변화를 모색하면서 기류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주요 테크 기업들이 신규 공급 후보군을 검토함에 따라, 양산 기술을 안정화한 LG이노텍도 글로벌 빅테크들과 장기공급계약을 논의하는 단계에 진입했다.
엔비디아 등의 AI 가속기(대규모 인공지능 연산용 전용 하드웨어)용 기판 물량 확보 경쟁이 치열해지는 가운데, LG이노텍은 글로벌 시장 진입을 목표로 원가 경쟁력과 차별화된 기술력을 입증하는 데 역량을 모으고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욜 디벨롭먼트(Yole) 등에 따르면 현재 하이엔드 AI 서버 및 가속기 기판 시장의 약 70~80%를 이비덴이 독점 중이다.
이비덴을 포함해 일본의 신코전기(Shinko Electric), 대만 유니마이크론(Unimicron) 등 글로벌 선발 업체들은 기판 위에 회로 모양을 그린 뒤 구리를 입히는 일반적인 도금 방식(SAP/MSAP) 기반의 기술을 주류 공정으로 활용한다.
그러나 이 도금 방식을 구현하려면 기판의 중심을 잡아줄 두꺼운 지지층(코어)이 구조적으로 필요하다.
이들 선발 업체들은 공정을 미세화하는 방식으로 전체 두께를 조금씩 줄여왔으나, 중심 지지층 자체의 두께 때문에 전체 기판 두께의 축소 폭은 10% 내외라는 한계에 직면해 있다.
이에 대응해 LG이노텍은 고성능 반도체 패키지 기판 시장에서 검증된 구조 혁신 기술을 전면에 내세우며 기술적 열세를 만회할 돌파구를 열었단 평가를 받는다.
LG이노텍은 다층 회로를 수직으로 쌓을 때 공간을 많이 차지하던 두꺼운 중심 지지층을 없앤 코어리스(Coreless) 기술을 적용해 제품 전체 두께를 기존 대비 20% 가까이 줄였다.
여기에 위·아래층 회로를 연결할 때 구멍 내벽에 구리를 얇게 입히던 기존 방식 대신, 기판 내부에 미세한 구리 기둥을 수직으로 직접 세워 층간 신호 통로를 잇는 Cu-Post(코퍼 포스트) 공법을 융합한다.
이를 통해 제한된 기판 면적 안에서 데이터 통로 밀도를 극대화하는 동시에, 초고성능 AI 칩 가동 시 발생하는 발열 문제까지 제어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LG이노텍은 구미 4공장에 AI 공정 제어 기술 등을 도입해 생산성 최적화에 주력하고 있다.
반도체 기판 사업은 스마트폰 제조사의 요구에 맞춰 제품을 맞춤 설계하는 카메라 모듈 사업과 달리, 글로벌 반도체 설계 기업들이 미리 정해둔 규격과 기준에 완벽히 부합하는 제품을 만들어야 하는 분야다.
이미 짜여진 반도체 생태계 안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호환성을 입증해야만 시장 진입이 가능하다.
사업 초기부터 수천억 원 규모의 대규모 최첨단 공장 설비 구축이 필수적이며, 매년 발생하는 막대한 장비 가치 감소(감가상각) 비용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한다는 점도 후발 주자에게는 장벽으로 작용한다.
글로벌 생태계 표준을 조기에 충족하지 못해 공급망 진입이 지연되면 투자 대비 적자 누적으로 인한 재무적 부담이 기업의 전반적인 성과를 악화시킬 수 있는 구조적 리스크를 안고 있다.
LG이노텍은 지난 2022년 시장 진출 선언 이후 대규모 공장 및 장비 투자를 집행했으며, 통상적인 투자금 회수 주기(4~5년)를 고려하면 오는 2028년 상반기가 본격적인 매출 회수의 기점이 된다.
만약 이 시점까지 시장 안착이 지연될 경우 누적된 고정비 부담이 회사 전체의 현금흐름과 성장 동력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공존한다.
시장에서는 낙관론에 무게가 실린다.
미래에셋증권이 지난 7일 발표한 기업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LG이노텍은 품질 검증이 끝나는 내년부터 차세대 고성능 반도체 기판(FC-BGA)의 본격적인 매출 확대와 기판 사업 부문의 수익성 개선이 맞물리며 완연한 이익 구조 전환기에 진입할 것으로 분석된다.
KB증권 역시 LG이노텍의 고성능 반도체 기판 매출이 올해 1400억원 수준에서 오는 2028년 1조1000억원, 2030년에는 2조3000억원 규모까지 가파르게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여기서 예상한 올해 매출 1400억원은 고성능 기판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기술 진입 장벽이 낮아 먼저 진입할 수 있었던 일반 PC 및 스마트폰용 기판 영역의 초기 전망치다.
반면 이비덴이 장악하고 있는 영역은 기술적 난이도가 가장 높고 단가도 월등히 비싼 최고 등급의 초고성능 AI 서버용 기판 시장이다.
LG이노텍의 진짜 승부처인 이 최고 등급 제품은 현재 글로벌 빅테크 고객사들과 최종 테스트 및 시제품 양산 검증 단계를 거치고 있으며, 이와 연계된 대규모 장기공급계약 협상도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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