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돈의 노예로 살지 않겠다…다큐 ‘담요를 입은 사람’

영화 ‘담요를 입은 사람’. 시네마 달 제공

주머니에 돈 한푼 없이 2년간 이어진 여행의 출발 총성은 분노였다.

다큐멘터리 영화 ‘담요를 입은 사람’(9일 개봉)의 감독이자 주인공인 박정미(41)씨가 두달 가까이 누워 있던 침대를 박차고 여행 짐을 꾸린 건 2014년의 어느 날이었다. 그는 가슴에 액션캠을 장착한 채 거울을 보고 이야기한다. “오늘부로 영국에서 1년 동안 돈 쓰지 않고 살아남기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깊은 한숨. 영화의 첫 장면이다.

서른을 앞두고 ‘워킹홀리데이’로 영국 런던에 온 그는 남들이 선망하는 한국 공공기관에 취업했다. 하지만 상사의 갑질은 그를 벼랑 끝으로 몰았다. “이러다 죽을 것 같아” 그만뒀을 때 그의 통장에는 두달치 방값만 있었다. “직장 문제로 멘털이 터진 상태에서 매일 아침 통장을 보면서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는구나. 이 돈이 떨어지면 죽어야 하는 건가? 이게 내가 태어난 이유고 삶의 목적인가?’ 하며 눈물을 쏟다가 분노가 치밀기 시작했어요. 더는 돈의 노예, 직장의 노예로 살기 싫다는 오기가 생기면서 돈 없이 살아보자는 무모한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지난 2일 서울 용산구 한 카페에서 만난 박 감독이 말했다.

영화 ‘담요를 입은 사람’. 시네마 달 제공

그는 온라인을 통해 주인이 비운 동안 잠시 머물 수 있는 집을 구했다. 대형 식당이나 식자재 마트에서 쓰레기로 나오는 음식물 중 쓸 만한 걸 주워 오는 ‘스킵 다이빙’은 소심한 그가 마주친 첫번째 관문이었다. “쓰레기 더미를 뒤질 엄두가 안 나 친구를 불러 함께 하면서” 익숙해질 무렵, 그는 본격적으로 돈 없이 살 수 있는 공동체를 찾아 나섰다. 주인의 동의를 받아 빈 건물을 점거해 사는 스쾃 무리를 비롯해 자급자족 농장 공동체, 전기마저 거부하며 직접 원시적인 발전까지 하는 극단주의적 친환경 공동체까지 찾아다녔다. 이동 수단은 런던의 한 자전거 가게에서 기증한 중고 자전거였고, 와이파이가 터지는 곳에서 다음 이동지를 찾아냈다.

목표했던 1년을 다 채워갈 무렵, 그에게는 기쁨이나 보람 대신 찜찜한 마음이 몰려왔다. “‘이렇게 멋진 사람들 속에서도 왜 나는 끊임없이 겉돌지? 왜 불편하고 불만족스럽지? 어느 순간부터 돈 안 쓰는 건 너무 쉬운 일이 됐는데도 왜 불안은 안 없어질까?’라는 질문이 사라지지 않으면서 ‘나에게 돈보다 더 큰 결핍이 있구나. 돈은 내 두려움을 덮는 장치일 뿐이었구나’ 깨닫게 됐어요.”

영화 ‘담요를 입은 사람’. 시네마 달 제공

환경주의 다큐처럼 보이던 영화는 이 지점에서 바뀌기 시작한다. 박 감독은 영국의 공동체를 떠나 “인생의 마지막 차가 될 수도 있는” 히치하이크로 유럽 대륙을 가로지른다. “돈에서 두려움으로 여행의 이유가 바뀌었어요. 내 두려움의 이유를 찾고 극복하려면 두려움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죠.” 서로 웃으며 “나 안 죽일 거죠?”라고 농담하는 따스한 운전자도 많았지만, 불쾌한 농담을 던지거나 돈뭉치를 내보이며 섹스를 요구하는 운전자도 있었다. 평생 못 잊을 여행 친구를 만나기도 했고, 대형 트럭을 개조해 타고 다니며 사랑과 평화를 노래하는 히피 공동체와도 어울렸다.

발트국가를 지나 그리스, 튀르키예, 이란으로 이어지는 긴 여정에서 그는 어느 순간 모든 걸 “저절로 일어나는 일에 맡기자”고 생각하게 됐다. 당장 잘 곳이 없는 그에게 하룻밤의 따뜻한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하는 가족들은 의외로 끊이지 않았다. 차를 태워준 한 튀르키예 사람이 그를 향해 ‘데르비시’ 같다고 말했다. 누더기 담요를 입고 떠돌며 보편적 사랑을 실천하는 이슬람 신비주의 수행자를 지칭하는 이 단어는 영화의 제목이 됐고, 긴 여정의 종착지는 데르비시 개더링(회합)이 열리는 이란이 됐다. 박 감독은 한국에 돌아와서도 전남광주 진도와 구례에서 5년씩 폐가를 직접 고쳐 살면서 여행 같고 수행 같은 삶을 이어왔다.

영화 ‘담요를 입은 사람’을 만든 박정미 감독. 시네마 달 제공

“돌이켜보면 제 여행은 떠남이 아니라 편한 마음으로 두려움 없이 지낼 수 있는 나의 집, 마음의 거처를 찾기 위한 여정이었어요.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이 여정은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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