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은함대와 요셉의 창고[투데이 窓/이윤학]

신대륙산 은 허비하다 도약 못한 스페인

구약 요셉은 7년 풍년 비축해 기근 대비

반도체 대박 한국, 과실 남아날지 기로에

이윤학 프리즘투자자문 대표

지표가 소리 없이 요동치고 있다. 올해 2분기 한국의 실질 국내총소득(GDI)은 전년 동기 대비 15.6% 증가했다. 같은 기간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3.7%였다. 소득 증가율이 생산 증가율을 무려 11.9%포인트나 앞질렀다. 이는 관련 통계 작성 이후 가장 큰 격차다.

GDP가 얼마나 많이 만들어냈는지를 보여준다면, GDI는 그렇게 생산한 결과로 얼마나 많은 실질 구매력을 손에 넣었는지를 말해준다. 같은 양의 반도체를 팔더라도 수출 가격이 오르고 원자재 등 수입 원자재 가격이 안정되면, 생산량은 그대로여도 국민경제 전체의 실질 구매력은 커진다. 최근 AI 반도체 호황과 교역조건 개선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한국 경제는 생산보다 더 큰 소득을 얻는, 보기 드문 풍년을 맞고 있다.

그러나 이 풍년을 '국민 모두의 통장이 두툼해졌다'는 뜻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GDI 급증으로 생긴 이익은 1차적으로 수출 기업의 영업이익과 정부 세수로 들어간다. 이것이 고용과 임금 상승, 내수 활성화라는 경로를 타고 가계로 퍼지기까지는 상당한 시차가 걸린다. 지표의 변화가 일상으로 곧바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는 갑작스러운 풍요를 맞이한 국가들에게 늘 서늘한 경고를 남겨왔다. 16세기 스페인의 항구에는 신대륙에서 채굴한 은(銀)을 가득 실은 '은함대'가 끊임없이 들어왔다. 막대한 부를 쥔 스페인은 유럽 최강국으로 군림했지만, 그 은은 국내 생산 기반과 기술을 키우는 자본이 되지 못했다. 손쉬운 부에 안주한 왕실은 군비 확장과 사치, 외채 상환으로 부를 소모했고, 물가 상승과 생산기반의 부실 속에서 국가 부도를 반복하며 중심을 잃어갔다. 은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은을 미래의 생산력으로 전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 네덜란드 역시 북해 천연가스 발견으로 막대한 외화가 유입되었으나, 환율과 임금 급등으로 기존 제조업의 경쟁력을 잃는 '네덜란드병'을 겪었다. 한국의 반도체 호황은 자원 횡재가 아닌 기술·설비 투자의 결실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하지만 특정 핵심 산업의 성과가 경제 전체의 체력으로 자동 전환된다고 믿는 순간, 유사한 '착시 현상'은 똑같이 반복될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스페인의 은함대가 아니라 '요셉의 창고'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요셉은 7년의 풍년이 찾아왔을 때 잔치를 벌이지 않았다. 수확의 일부를 차곡차곡 저장해 다가올 7년의 기근에 대비했다. 현대의 노르웨이 역시 비슷한 길을 걸었다. 북해 석유 수익을 소비하지 않고 국부펀드에 적립해 해외 자산에 분산 투자했으며, 엄격한 재정준칙에 따라 장기 실질 수익의 일부만 국가 재정에 활용하고 있다. 풍요를 현재의 소비가 아닌 미래의 안전판으로 바꾼 선택이다.

정책 당국과 경제 주체들의 역할도 분명하다. 한국은행은 교역조건 개선으로 늘어난 유동성이 자산 시장이나 물가를 자극하는 불길로 번지지 않도록 수문을 엄격히 관리해야 한다. 정부는 호황으로 얻은 세수 여력을 단기 소비성 지출로 소진할 것이 아니라, 연구개발, 인프라 확충, 인재 양성, 그리고 국가 재정의 완충력을 높이는 생산성 투자에 써야 한다.

투자자의 시선도 정교해져야 한다. GDI 급증은 특정 가격결정력을 가진 산업의 기회일 뿐, 시장 전체의 무차별적 가치 상승을 의미하지 않는다. 즉 좋은 경제지표와 좋은 투자는 같은 말이 아니다. 수출량보다 수출단가를, GDP보다 교역조건을 입체적으로 읽어내며 풍년의 착시에 빠지지 않는 냉정함이 필요하다.

GDP보다 11.9%포인트나 높은 GDI는 한국 경제가 받은 영구적인 훈장이 아니다. 대외 환경이 허락한 귀중한 유예기간이다. 스페인의 은함대처럼 오늘을 위해 모두 소진할 것인가, 아니면 요셉의 창고처럼 내일을 위해 저장할 것인가. 진짜 선택은 지금 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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