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강희 | 사유하는 공학자·경북대 겸임교수
2026년의 완연한 봄날, 캠퍼스와 직장, 그리고 각자의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너희들을 볼 때면 내 마음 한구석에는 늘 무거운 돌덩이 하나가 내려앉는다.
너희의 눈에 비친 우리 세대는 사다리를 걷어차고 통제권을 꽉 쥔 채 위선적인 도덕을 설파하는 낡은 기득권일지도 모르겠다. 너희의 그 차갑고 날 선 비판을 마주할 때면, 머리로는 그 구조적 억울함을 뼈저리게 이해하면서도 가슴으로는 차마 다 삼켜내지 못할 서글픔과 비애를 느끼곤 한다. 오늘은 그 비판 앞에 선 어느 ‘불완전한 생존자’의 변명, 혹은 서툰 고백을 조심스레 건네보려 한다.
너희가 원망하는 것처럼, 우리가 살아온 시대가 단군 이래 가장 풍요로웠던 축복받은 시대였음은 부인하지 않겠다. 아날로그의 낭만을 누렸고, 디지털 혁명의 과실을 맛보았다. 하지만 우리가 마주했던 현실의 이면 역시 결코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다. 대학 문을 나서자마자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라는 거대한 해일이 덮쳤고, 어제까지 책상을 나란히 하던 선배와 동료들이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몰리는 것을 목격해야 했다. 그 공포는 우리 세대의 디엔에이(DNA)에 깊이 각인되었다. ‘한번 삐끗하면 나락으로 떨어진다’, ‘아무도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절박함이었다. 너희가 기득권의 탐욕이라 부르는 우리의 꽉 쥔 두 주먹은, 사실은 낭떠러지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피가 나도록 부여잡고 있던 생존의 밧줄이었다. 위로는 연금 없는 부모를 부양하고 아래로는 너희들의 미래를 책임져야 하는 무거운 짐 속에서, 우리는 우리 삶의 운전대를 차마 온전히 내려놓을 수 없는 쫓기는 소시민에 불과했다.
가장 고통스러운 딜레마는 너희를 길러내는 과정에서 찾아왔다. 우리는 우리가 겪은 억압과 획일주의를 물려주기 싫었다. 그래서 너희에게는 자유롭게 사고하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으며, 사회적 책임감을 갖춘 도덕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세상의 변화를 이끄는 주역이 되라고 등을 두드렸다. 하지만 정작 내 아이가 지성의 전당에 들어가 사회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험난한 변화의 길을 걸으려 할 때, 나는 지독한 무력감에 빠지고 말았다. 세상이 얼마나 차갑고 냉혹한지 너무나 잘 알기에, “그런 무거운 짐은 내려놓고 그저 남들처럼 편하고 안전한 길을 가라”라고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싶은 비겁한 현실론이 턱 끝까지 차올랐기 때문이다. 이상을 가르쳐놓고 현실에 순응하기를 바라는 이 모순. 이것이 바로 시대를 바꿀 용기는 잃어버리고 늙어가는 ‘낀 세대’ 부모의 뼈아픈 한계이자 서글픈 본심이다.
그래서 나는 너희가 기성세대의 도덕적 가르침을 위선이라 조롱하며, 차가운 능력주의와 각자도생의 길로 돌아서는 것을 원망할 수 없다. 단 한번의 실패도 용납하지 않는 초경쟁의 툰드라 지대에 너희를 맨몸으로 세워둔 채, 따뜻한 연대나 사회적 책임 같은 배부른 소리를 늘어놓는 것이 얼마나 공허한 설교로 들렸겠는가. 생존 자체가 지상 과제가 된 너희들에게 기계적인 공정성만이 유일한 방패라는 사실을, 나는 아프게 인정한다. 우리의 서투른 양육과 불완전한 사회 안전망이 너희를 그토록 날카롭고 외로운 전사로 만들어버렸다.
우리는 인류 역사상 유례없이 압축된 시간을 관통하며 살아남았지만, 정작 다음 세대에게 숨통이 트이는 세상을 물려주는 데는 실패한 것 같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알아주었으면 한다. 우리가 쥔 것을 쉽게 넘겨주지 못한 것은 너희를 통제하려 함이 아니라, 아직 우리 어깨에 지워진 남은 생존의 무게를 다 덜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리고 비록 표현은 서툴고 때로는 위선적으로 보일지언정, 치열한 경쟁 속에서 상처받고 웅크린 너희의 뒷모습을 보며 매일 밤 남몰래 가슴을 치고 아파하는 것이 우리 세대의 진짜 진심이라는 것을 말이다.
정답을 주지 못해 미안하다. 더 평평하고 안전한 운동장을 만들어주지 못해 미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공지능(AI)이 인간을 위협하고 승자독식의 경쟁이 난무하는 이 혹독한 2026년의 봄날 속에서도, 기어코 너희만의 방식으로 연대하고 인간다움을 지켜내려는 그 치열한 발걸음을 나는 온 마음을 다해 응원한다. 편한 길을 걷길 바라는 부모의 나약함을 뒤로하고, 기꺼이 좁고 험난한 길을 선택해 세상을 고민하는 너희들이 우리는 참으로 눈부시고 고맙다. 우리가 미처 다 건너지 못한 시대의 강을, 너희는 반드시 더 지혜롭고 단단하게 건너갈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