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합니다] 전북 문단의 ‘큰 나무’ 정양 시인 1주기

눈을 유난히 좋아했던 시인. 아침에 창문을 열었을 때 산도 들판도 지붕도 골목도 마당도 꼭 그만큼씩 평등하게 눈에 덮인 세상, 어제까지 보아온 세상이 아닌 눈부신 아침을 그리워한 정양(1942~2025.5.31) 시인. 보리누름(보리가 누렇게 익은 철)에 산들바람이 불던 지난해 5월31일, 우리 곁을 떠났다.
세태 담론에 간섭받음 없는 시편들
곡진하고 쓰라리게 정다우면서도
시적 사유는 역사적 통찰로 발현
선생의 말투며 행동은 느렸다. 때로 더디기까지 한 속도로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목적으로 대하는 이들과 너나들이로 시간을 즐겼다. 1968년 ‘대한일보’에 ‘천정을 보며’가 당선된 후 첫 시집 ‘까마귀떼’(은애·1980년)로부터 ‘암시랑토앙케’(몰개·2023년)에 이르기까지 선생은 일곱권의 시집을 냈다. 세태 담론에 간섭받음이 없는 시편들은 곡진하고 쓰라리게 정다우면서도 시적 사유가 역사적 통찰력으로 발현되었다는 평을 받았다.
일상적이지 않은 삶의 정서적 충격과 경이감을 입고, 한편의 시가 역사성과 현재성을 동시에 얻을 수 있을까. 이 답을 우리는 선생의 ‘내 살던 뒤안에’에서 얻는다. “감꽃들이/ 새소리처럼 깔려 있”고 “새소리가 감꽃처럼/ 털”린다는 생생한 이미지를 감고 구렁이 몸에서 “햇빛이 치잉칭 풀리”는 데에 닿는 경이로운 활력은 차라리 전율이다. 새소리와 감꽃과 손가락질이 구렁이에 집중되어 “햇살 같은 환성들이/ 비늘마다 부서지”는 정황은 절창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된 아버지가 살아서 돌아온다고 점쟁이가 예언한 날 집에 들이닥친 구렁이는 한국 현대시의 상징적 좌표이자 동력이 아닐까.

유성호(한양대 교수)는 선생의 여섯번째 시집 ‘헛디디며 헛짚으며’(모악·2016년)가 제8회 구상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되었을 때 “정양 시인은 오랫동안 전북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해 왔지만 그만의 흔치 않은 내공으로 많은 후학이 흔연히 따르고 어울리는 ‘큰 나무’로서의 품과 격을 거느려왔다. 그에게서 우리는 시적 염결성으로 한 시절을 관통해온 한 대가급 시인의 면모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번 시집 안에는 오래도록 자신을 감싸왔던 눈물의 기억들을 오늘에 비추어보려는 온고(溫故)의 시선이 있고, 가파른 현실과 맞서 그것을 증언하려는 선 굵은 감계(鑑戒)의 목소리가 있다”는 심사평도 전했다.
한국시의 희망은 역사서 비롯됨을
전북 토박이말과 소리 맵시로 언표
세월호 침몰에 접목된 유고시 ‘참담한 소원이’에 나타난 감계의 목소리도 예외는 아니다. 남녀 고교생 304명의 목숨을 한꺼번에 앗아간 사회적 불행의 진상이 아직도 침몰 중이라는 데에서 촉발된 이 시는 진실을 캐고 싶은 ‘파도’와 시인이 동일시된다.
“걸핏하면 눈물보를 건드는 파도는/ 뼛조각이라도 찾아 기필코 유가족이 되고 싶은/ 참담한 소원 때문에 진상이 유실되는/ 분노 때문에 바라볼 때마다 더 거칠게 몸부림치고.”(‘참담한 소원이’ 부분)
4.16은 참살(慘殺)이었다. 그러므로 맹골수도에서 더 거칠게 몸부림치는 파도의 숨이 가쁘다. 이딴 게 나라냐고 파들거리는 파도는 4·16 참살을 낱낱이 목격한 시대의 냉철한 눈이다. 기필코 유가족이 되고 싶은 파도의 참담한 소원은 어떤 세력이 고교생들을 떼죽음시켰는지 밝히라는 시의 욕망이자 이런 참담한 일을 경계하는 시의 생명력으로 확장된다.

눈 덮인 아침을 좋아했지만 부조리한 현실에 단호했던 시인. 유신독재 시절에 ‘끝’이라는 시를 쓴 뒤 절필했고 참담한 5공화국 시절에는 동료 문인들과 무크지 ‘민족문학’을 기획했으며 사람다운 세상을 평생 그리워한 시인. 한국시의 희망은 우리 민족이 통과해온 역사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전북 토박이말과 그 소리 맵시로 언표한 시인. 준엄하게 치죄하고 단죄되었어야 할 세력이 되레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오늘의 모순을 짚어간 시편들은 왜 사는가, 모두 아름답게 살고 있는가, 발 딛고 선 여기가 역사의 어느 지점인가를 묻는다. 광복 후 80년 넘도록 독립기념일이 없는 참담한 역사 앞에, 무덤조차 없이 버려진 혼백들 앞에 소월의 ‘초혼’을 절절히 낭송하고 싶던 정양 시인.
전북작가회의·문인협회 등 주축으로
30일 고향 은행나무 앞 1주기 시회
선생의 1주기를 맞아 정양 시인을 기억하는 시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왔다. 전북작가회의, 전북문인협회 등이 주축이 되고 선생을 추모하는 분들과 제자들이 오는 30일 그의 고향인 전북 김제시 공덕면 마현리 650년 된 은행나무 앞에서 시회를 연다는 것이다. 시의 안팎은 변함없이 사람이 희망임을 믿었던 정양 선생은 그날, 동료 문인들과 제자들이 차려낼 “보리누름에 산들바람”을 살뜰히 흠향하리라.
이병초/시인·전북작가회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