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적 파시즘 체제, 이스라엘 [장석준의 그래도 진보정치]

지난해 9월3일 이스라엘 남부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군이 탱크를 몰고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장석준 | 배곳 산현재 기획위원

민주주의이면서 파시즘인 체제가 있을 수 있는가? 이것은 마치, 무생물이면서 생물일 수 있는가, 하고 묻는 것과도 같다. 파시즘의 정의 중 핵심이 ‘민주주의의 실질적 파괴’인데, 어찌 ‘민주적’ 파시즘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지금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 국가가 이런 상식을 비웃으며 ‘민주적 파시즘’이라는 신조어 말고 달리 표현할 수 없는 상태로 치닫고 있다. 국내 제도는 민주정이지만, 국경 안팎에서 지난 세기 최악의 파시즘, 즉 독일 나치즘이 벌인 인종 학살을 반복하는 국가. 이스라엘이다.

국내 제도만 보면, 이스라엘은 견실한 민주 국가다. 이 나라는 의회정부제(내각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크네세트(의회)는 전국이 단일 선거구인 정당명부비례대표제로 구성된다. 이런 선거제도 덕분에 이스라엘에서는 10여개가 넘는 정당이 원내에서 활발히 활동한다.

전쟁광 베냐민 네타냐후도 이런 다당 구도에서 정치적 곡예를 부리며 어렵사리 우파 연립정부를 꾸려가는 것이지 무슨 독재자는 아니다. 비록 사법부 권한 축소를 시도했다가 대규모 반대 시위와 맞닥뜨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네타냐후 일가의 부패에 대한 법원의 재판이 의연히 계속되고 있다. 야당들은 곧 다가올 총선에서 이런 네타냐후를 심판하겠다고 벼르는 중이고, 실제로 정권교체 가능성이 크다.

이 정도면 차라리 ‘모범적’ 민주 국가라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모범적’ 민주 국가가 일상에서 어떤 식으로 존립하는지 보자. 이스라엘은 지구상에서 거의 유일하게 확정적 국경선이 없는 나라다. 1947년에 유엔이 정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할선이 있지만, 이스라엘은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으로 이 분할선을 넘어 점령지를 확장했고 이후 서안지구 등에서 집요하게 영토를 야금야금 넓히고 있다. 생존하려면 지금보다 더 넓은 영역을 차지해야 한다는 생각이 이스라엘 사회에 널리 퍼져 있고, 그래서 일부러 국경을 확정하지 않은 채 지금도 곳곳에서 군사작전, 즉 전쟁을 벌인다. 이 대목에서, 생존 공간을 확보해야겠다며 동쪽으로 진군하던 나치 독일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기란 힘들다.

그런데 과연 ‘누구의’ 생존 공간인가? 당연히 ‘이스라엘 국민’이겠지만, 이게 보통의 ‘국민’과는 의미가 사뭇 다르다. 성문헌법이 없는 이스라엘에서 헌법을 대신하는 기본법(1985년 개정)은 이스라엘을 ‘유대인-민주 국가’라 규정한다. ‘유대인’ 국가이기에 유대인으로 인정받기만 하면 세계 곳곳에서 이스라엘로 몰려와 새로 확보한 공간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또한 ‘유대인’ 국가이기에 그렇게 확보한 공간에서 조상 대대로 살아온, 아랍어를 쓰는 주민은 시민권을 온전히 인정받지 못한다. 이스라엘 안에서 이미 인구 20% 이상을 차지하는 아랍계 주민처럼 2등 시민으로 살아가거나, 아니면 서안지구나 가자의 팔레스타인인들처럼 인종 청소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런 체제에 어울리는 말이 바로 ‘민주적 파시즘’이다. 제도는 민주정이지만, 그런 제도보다 더 근본적인 수준에서 민주주의의 핵심을 이루는 보편적 평등의 원칙, 즉 타자 역시 권리의 평등한 주역임을 부정하며 존립하는 체제는 그렇게 불려야 마땅하다. 그리고 이런 이스라엘의 모습은 앞으로 모든 민주 국가들이 늘 돌아봐야 할 ‘거울’이다. 기후급변이나 전쟁위기 같은 21세기의 시험 속에서 우리 모두는 ‘또 다른 이스라엘’이 될 위험과 끊임없이 투쟁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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