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일이 경제·안보를 중심으로 밀착하는 배경의 하나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가 있다는 분석이 일본 언론에서 나온다.
20일 일본 아사히신문은 하루 전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 대해 “다카이치 총리가 이재명 대통령의 고향인 안동에서 국빈급 대접을 받으며 긴밀한 한·일 관계를 강하게 부각시켰다”며 “미·중 화해와 이란 호르무즈해협 봉쇄 등 국제 정세가 요동치는 가운데 한·일 정상이 ‘전략적 연대가 필수’라는 판단으로 신뢰 관계를 착실히 다지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 두 정상은 지난 4개월 사이 일본 나라현과 경북 안동을 오가는 ‘정상 간 고향 셔틀 외교’를 통해 가시적 성과를 내고 있다. 19일 안동 정상회담에서는 한·일간 공급망 강화와 핵심 에너지원인 액화천연가스(LNG)·원유 분야 협력을 확대하기로 뜻을 모았다. 안보 분야에서는 이번 정상회담 직전 한·일 안보정책협의회를 차관급으로 격상했고, 두 나라 경찰청 사이에 ‘초국가 스캠범죄 공동 대응을 위한 협력각서’를 체결됐다.
지난 1월 다카이치 총리의 고향인 나라현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는 일제강점기 조세이 탄광 수몰 사고로 숨진 조선인 등 희생자 유골의 디엔에이(DNA) 감정에 두 나라가 협력하기로 했다. 이 대통령은 이번 정상회담 뒤에도 이 문제를 다시 언급하며 “긴밀한 실무협의를 통해 디엔에이 감정의 구체적 절차와 방법에 합의했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나란히 취임한 이 대통령과 다카이치 총리가 이례적이라고 할 만큼 한·일 협력을 강화하는 데는 미국의 외교 정책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이 대통령과 다카이치 총리의 회담 빈도가 늘어나는 배경에 트럼프 대통령의 존재가 있다”며 “아시아에서 힘의 공백이 현실화하면서 한·일이 가까워지게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미국의 패권을 확고히 하는 ‘돈로주의’(도널드+먼로주의)를 앞세워 아시아 지역에서 발을 빼는 듯한 태도를 보이자, 한·일이 협력을 강화해 미국의 빈자리를 매우려 한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이 이스라엘과 함께 이란 전쟁을 벌이면서 군사력을 중동 지역으로 대거 이동하자 한국과 일본의 우려는 더욱 커지고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 시절 한 해 1차례 이상 개최하기로 했던 한·미·일 정상회담도 트럼프 집권 2기 들어서는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다. 오히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4일 중국 베이징을 찾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열어 중국과 ‘화해 무드’를 연출하고 있다.
이 대통령의 ‘실용주의 외교’가 다카이치 총리의 성향과 맞아떨어지는 영향이라는 풀이도 나온다. 아사히신문은 “‘실용 외교’를 내세우고 있는 이재명 정부에게 한·일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게 상징적 사례가 되고 있다”며 “한국 여론조사 기관 갤럽이 1월 실시한 일·미·중·러 정상 호감도 조사에서 다카이치 총리가 1위를 차지하는 등 여론도 호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안보 분야에서는 장애물이 높은 편이다. 한·일 정부는 지난 7일 서울에서 첫 외교·국방 2+2 차관급 회의를 가졌다. 다음 달에는 한국 해군과 해상자위대가 수색·구조 공동훈련(SAREX) 9년 만에 재개할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한국군과 자위대의 탄약 등 물자 협력을 위한 상호군수지원협정(ACSA) 체결을 제안한 것에 대해서는 한국 정부가 난색을 드러낸 것으로 전해졌다. 아사히신문은 “한·일이 역사나 영토 관련 문제에 깊이 들어가지 않고, 경제 협력 등을 추진하며 양호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며 “까다로운 영역까지 갈 만한 신뢰 관계까지 쌓아갈지가 향후 한·일 관계의 관건”이라고 내다봤다.
도쿄/홍석재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