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이팝을 좋아하니까 케이팝과 관련한 연재 코너를 하나 만들어달라.”
2024년 4월, 잠시 뉴스룸을 떠나 회사의 전략·기획 업무를 담당할 때 일입니다. 새로운 독자 유입을 위한 일종의 ‘미션’ 하나를 부여받았습니다. 당시 온앤오프의 ‘바이 마이 몬스터’(Bye my monster)라는 노래에 푹 빠져 “아이 돈 워너 비 어 몬스터~”란 후렴구를 흥얼거리며 다니던 저는 신나서 그러겠노라고 답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습니다. “케이팝을 좋아한다”지만 정작 저는 소위 말하는 ‘덕질’의 경험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음악을 좋아하고 다양한 장르의 무대를 보는 걸 즐기지만, 좋은 노래는 자주 들으면 그만이고 멋진 공연에는 열렬한 박수를 보내면 충분했습니다. 다만 취미로 케이팝 댄스를 배우면서 수많은 아이돌의 무대를 챙겨본 덕에 요즘 케이팝의 흐름을 어렴풋이 파악하고 있을 뿐이었죠.
이를테면 케이팝이 국가의 위상까지 좌우하는 거대한 산업이 되었다는 것, 소수의 대형 기획사가 주도하는 구조가 더욱 강화됐고 아이돌을 양성하는 대규모의 협업 시스템 역시 견고해졌다는 것, 팬덤을 소비자로 만드는데 능하고 이러한 팬덤 문화가 다른 분야로까지 확산했다는 것, 그런데 정작 팬들의 목소리는 대부분 응답없는 메아리에서 그친다는 것 등입니다. 대개 트위터(현 엑스)의 해시태그 운동이나 소속사 앞으로 트럭을 보내는 방법을 통해서요. 그 안에서 수없이 ‘탈케’(탈 케이팝)를 꿈꾸지만 번번이 실패하여 내적 갈등을 겪는 팬들의 모습도 여러번 보았습니다.
이번 코너를 통해 이 거대한 산업에 내재돼있는 여러 논쟁적 의제를 다뤄보고 싶었습니다. 대대적으로 보도되는 ‘빌보드 순위’나 ‘수익 규모’ 등에 가려진 이야기도 담고 싶었습니다. 그러려면 케이팝 씬에 가장 열정적으로 참여하지만 동시에 소외돼있는 팬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같은 해 9월 열린 ‘케이팝 하는 여자들’ 토크에 발제자로 참여하면서 비슷한 고민을 하는 여러 동료를 만났죠. 이 자리에서 나눈 밀도 높은 이야기가 휘발되는 것이 아쉬웠고, 결국 당시 토크를 기획했던 유진·구구님과 함께 ‘케이팝, 사랑과 탈출사이’를 시작했습니다.

지난 1년 여 동안 20명의 필자가 노동, 사랑, 퀴어, 환경, 창작, 페미니즘, 팬덤문화 등 케이팝을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를 써내려갔습니다. 기꺼이 자신의 ‘덕질’ 경험과 그 안의 내밀한 고민을 나눠준 필자 분들께, 또 인터뷰 요청을 흔쾌히 수락해주신 분들께 감사함을 전합니다. 이 연재가 하나의 작은 공론장이 되기를 바라면서 매 회차마다 독자의 의견을 받는 란을 별도로 열어뒀습니다. 매번 칼럼을 누구보다 꼼꼼히 읽고 정성스러운 의견을 보내주신 독자 분들께도 깊이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물론 아쉬움도 남습니다. 연재 후반부에는 취재나 인터뷰를 바탕으로 케이팝 산업 내부를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중간에 뉴스룸으로 복귀하면서 충분히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여러 독자 분들이 요청해주신대로 케이팝을 지탱하는 스태프와 창작자의 이야기를 더 자세히 다루지 못한 건 특히 마음에 남습니다.
안무 저작권이나 ‘아이돌 노조’처럼 새롭게 떠오른 이슈, 케이팝 산업의 또다른 축인 굿즈나 음반 유통 분야 현안들, 대통령 직속 대중문화교류위원회의 역할을 비롯한 여러 정책도 폭넓게 다뤄보고 싶었지만 숙제로 남았습니다. 한 대형 기획사와 함께 팬의 목소리를 듣고 고민을 나누는 자리도 추진했지만 끝내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케이팝, 사랑과 탈출사이 시즌2’를 하게 된다면, 그 때 못다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연재 기간 동안 제게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앞서 말했듯 저는 “사람들은 왜 제 3자에 불과한 타인을 그토록 응원할까”란 질문을 품은 쪽에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2024년 9월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온앤오프의 단독 콘서트를 보며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들이 여러 곡절 끝에 도달한 큰 무대에서 행복한 얼굴로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이, 그리고 더 큰 꿈을 열망하는 모습이 마음에 잔잔하지만 깊은 파문 하나를 남겼기 때문입니다.
그날 공연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내내 곱씹었습니다. “누군가의 서사를 응원한다는 건 이런 마음이구나”라는 걸요. 오래 걸린만큼 더욱 뜨거울(‘메시지 Message’·온앤오프), 그 반짝이는 눈빛을 오래도록 보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응원하는 그룹을 보고 있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가장 많이 떠올립니다. 저는 종종 제 안에 회의, 염세, 냉소와 같은 것들이 찐득하게 달라붙어있는 걸 발견하곤 합니다. 사회를 들여다보고 사람을 만나는 일을 하면서, 어쩌면 세상의 많은 일은 어차피 답이 정해져있는 싸움과 같은 것 아닐까 싶은 비관에 쉽게 빠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세상엔 노력과 진심만으로 되지 않는 일이 너무도 많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노력과 진심으로 우직하게 자신만의 새로운 이야길 써가는(‘비 히어 나우 Be here now’·온앤오프) 모습을 자주 응원하는 그룹으로부터 발견합니다. 당연히 쉬운 일은 아니겠습니다만, 그 꾸준한 분투가 제겐 위안이자 용기, 또 희망이 됩니다.
‘덕질’이라는 것은 결국 각자가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는 일일테지요. 세상의 모든 답없는 싸움들이 승리를 거두길 바라는 건 욕심이겠지만, 적어도 응원하는 그룹이 해 온 노력이, 밤새 움튼 그들의 진심이(‘마이 송 My song’·온앤오프) 보란 듯이 활짝 피어나기를(‘뷰티풀 뷰티풀 Beautiful Beautiful’·온앤오프), 끝끝내 빛을 발하기를, 그렇게 찬란한 별이 되어(‘뷰티풀 뷰티풀 Beautiful Beautiful’·온앤오프)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남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연재하는 동안 연령과 성별, 국적을 가리지 않고 ‘덕질’을 하는 많은 분들을 만났습니다. 좋아하는 대상도, 이유도 제각각이었지만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응원하는 그 누군가 덕분에 자신의 삶이 얼마나 충만하게 행복한지 달뜬 목소리로 말할 때면, 얼굴에 더없이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는 겁니다. 사랑을 동력으로 살아가는 일의 아름다움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슬픈 일로 가득 찬 못된 하루를 보내도/그 마음 전부 그대로 내게 전해줘/내가 노래가 될게 넌 나의 일기가 돼줘/매일매일 너를 담은 노랠 만들 수 있게/오늘도 쓰인 이 페이지 내일 너에게 들려줄게/난 너의 노래야” (‘유어 송 Your song’·온앤오프)
위로가 필요한 날이면 저는 이 노래의 가사에 기대어 힘을 내곤 합니다. 자신만의 노래 안에서, 앞으로도 즐겁고 건강하게 케이팝 하시길 바랍니다.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케이팝, 사랑과 탈출 사이’ 전 회차 다시 보기
1회: ‘오빠’들은 툭하면 ‘빠순이’의 뒤통수를 때린다 (일석)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188526.html
2회: 나의 최애, 빌보드 1위 하면 연애해도 되나요 (일석)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189758.html
3회: 팬의 ‘공짜 노동’은 진화한다…더 빠르게, 더 짧게, 더 자주 (서해인)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191075.html
4회: ‘탈케’와 ‘어덕행덕’ 사이…‘케이팝적 번아웃’이 온다 (서해인)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192242.html
5회: ‘노오력’ 해서 ‘육각형 아이돌’ 되면 행복할까요? 육각형이 끝일까요? (주연)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193424.html
6회: 돈 주고 살게요…최애의 모든 날, 모든 순간을 (박다해)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194623.html
7회: ‘노동착취 없는 케이팝’ 상상불가능한 세계를 상상하기 (박다해)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196955.html
8회: 케이팝 공연장에서 응원봉 없이 응원할 수 있을까 (장지현)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198119.html
9회: ‘최애’와 ‘팬덤’ 너머…‘자본가’들의 케이팝이 말하지 않는 것 (장지현)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199312.html
10회: 나는 왜 ‘최애’의 팬 사인회에서 괴로웠나 (아밀)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200602.html
11회: ‘소비자’가 아닌 팬으로, 나의 최애를 어떻게 사랑할까 (아밀)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201695.html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202934.html
13회: 미션: ‘천사’를 인간으로 되돌리기 (이희주)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204119.html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205363.html
15회: 그 많던 아이돌 인형은 누가 다 샀을까? (유진)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206581.html
16회: ‘키빼몸 120 되면 아이돌 데뷔’란 ‘가학’이 내게 남긴 것 (곽예인)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207787.html
17회: 먹는 행복과 사랑받는 행복은 함께 갈 수 있다 (곽예인)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209014.html
18회: ‘탑100’ 중심 음악 차트가 케이팝을 흔드는 방법 (조혜림)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210234.html
19회: ‘본인 확인’도, ‘얼굴 입장’도…팬이 다 떠안으면 그만일까 (여름봄)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211415.html
20회: 케이팝을 사랑해서…작사가 ‘지망생’이 되었다 (윤혜은)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212571.html
21회: 케이팝 작사 ‘노동’, 사랑하는 만큼 계속 쓰는 법 (윤혜은)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213734.html
22회: 케이팝 팬들이 응원봉에 퀴어 ‘묻히는’ 이유 (연혜원)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214950.html
23회: 케이팝 덕후가 태국 배우 덕질을 하게 된 이유 (주연)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217467.html
24회: 당신의 ‘최애’가 커밍아웃을 한다면? (주연)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218702.html
25회: 오늘도 덕질을 한다, 스트레스와 함께 (김윤하)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219927.html
26회: 나의 사랑이 누군가의 ‘노동’을 지워버린다면 (유진)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221231.html
27회: 케이팝에 ‘명품 앰배서더’라는 유령이 배회한다 (김무명)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224264.html
28회: ‘랜덤 포카’ 끼워팔기 괜찮나요? 문체부에 물었습니다 (박다해)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226992.html
29회: 침묵 속의 사랑: 내 ‘최애’는 정치인이 될 수 있을까? (복길)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229569.html
30회: 연애를 들키면 안 되는 아이돌 ‘직업윤리’, 당연한 건가요? (이예지)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230844.html
31회: 케이팝을 만드는 사람들: ‘창의 노동’의 환상과 그림자 (김은정)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234563.html
32회: 아이돌, ‘완성형 상품’에서 확장 가능한 ‘브랜드’로 (김은정)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235831.html
33회: 최애가 ‘기후위기’를 말한다면? 케이팝 ‘저탄소 콘서트’에 필요한 것 (인터뷰① 케이팝포플래닛)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238016.html
34회: 최애가 밥 먹여주냐고요? 동료를 만들어줍니다! (윤주라)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240406.html
35회: “기획사·미디어·팬덤이 결합해 아이돌의 ‘사랑 노동’ 만들어내죠” (인터뷰② 김은정 문화연구자)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252789.html
36회: “자신만의 메시지가 분명한 아이돌이 좋은 공연을 만들죠” (인터뷰 ③ 서동현 플랜에이PD·구본영 비웨이브엔터테인먼트 대표·이형진 엠넷PD)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254964.html
37회: 최애를 ‘소비’하지 않고 사랑하는 일 (노혜지)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257319.html
☞독자의 응답 읽어보기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216202.html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222945.html
“‘팬싸템’은 그만…아이돌과 팬 사이 적당한 거리가 필요해요”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228304.html
“상품화된 만남 속에서 최애를 응원하는 마음은 어떤 가치가 있을까요”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233338.html
케이팝으로 만난 동료, ‘탈케’한 뒤엔 어떻게 지내나요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242820.html
△케이팝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다면
-‘케이팝 하는 여자들’ 프로젝트 (https://www.womenwithkpop.com/)
‘케이팝 하는 여자들’은 케이팝 소비자의 다수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산업과 문화에서 여성 팬의 목소리가 배제되는 현실에 문제의식을 갖고 출발한 프로젝트입니다. 우리는 팬을 단순한 소비자가 아닌 사랑과 의미를 만들어내는 주체로 바라봅니다.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팬 사이의 새로운 연결점을 고민하며, 팬 커뮤니케이션, 기획, 콘텐츠 등 다양한 방식으로 팬과 아티스트 사이의 관계를 더 건강하게 설계하는 일을 제안합니다.
☞유튜브 보기 (https://www.youtube.com/@womenwithkpop)
☞‘케이팝과 사랑의 언어들’ 칼럼 읽기 (‘쿠킹 케이팝’ AAD 워크숍)
-‘케이팝, 사랑과 탈출 사이’ 필자가 쓴 도서들


‘케이팝 응원봉 걸스' (희주·일석·구구/클레이하우스)
‘왜요, 아이돌이 어때서요?' (박주연/동녘)
‘페미돌로지' (류진희·백문임·허윤 기획/빨간소금)
‘로드킬' (아밀/비채)
‘성소년' (이희주/문학동네)
‘환상통' (이희주/문학동네)
‘나는 거기 없음' (곽예인/위고)
‘음악의 쓰임' (조혜림/파이퍼프레스)
‘아무튼, 아이돌' (윤혜은/제철소)
‘퀴어돌로지' (연혜원 기획/오월의봄)
‘케이팝 씬의 순간들' (김윤하·미묘·박준우/미래의창)
*‘케이팝, 사랑과 탈출 사이’는 ‘케이팝 하는 여자들’과 ‘들불’, 한겨레가 공동 기획한 연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