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상원 | 전국팀 선임기자
내가 대학에 다닐 때 부모님은 부산에서 편의점을 운영하셨다. 개업하던 날 손님들에게 시장바구니를 사은품으로 나눠줬다. 부모님은 손님들이 그 시장바구니를 들고 와서 상품을 담아가는 모습을 보며 흐뭇해하셨다.
하지만 그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세븐일레븐·훼미리마트 등 일본 편의점을 본뜬 가맹점 본사는 ‘일본의 선진 기법’을 가맹점주들에게 그대로 적용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손님들 ‘편의’를 위해 휴일 없이 365일 24시간 영업해야 한다는 것이다. 길거리에 개미 한마리 없는 한밤중에도 가게는 환하게 불을 밝혔고, 부모님이나 아르바이트생이 뜬눈으로 자리를 지켜야 했다. 새벽에 술 취한 사람이 들어와서 아르바이트생을 폭행하는 일도 있었다. 또 본사는 거의 팔리지 않는 상품을 인기상품에 끼워서 억지로 떠안겼다. 인기상품을 받으려면, 거부할 수 없었다. 그리고 유통기한이 되면 전량 폐기해야 했다. 매출과 손해가 함께 불어나는 이상한 구조였다.
결정적으로 편의점 근처에 대형마트가 문을 열면서 손님들의 발길마저 뚝 끊겼다. 결국 부모님은 버티지 못하고 폐업을 했다. 본사는 진열돼 있던 상품을 인수해주지 않았다. 뼈저린 경험을 한 부모님은 지금도 편의점을 이용하지 않으신다.
오늘날 우리는 편의점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국내 편의점은 5만개를 넘겼다. 1천명당 1개꼴이다. 인구당 편의점 밀도는 일본의 2배 수준이다. 편의점 업계 양대 강자인 비지에프(BGF)리테일의 씨유(CU)와 지에스(GS)리테일의 지에스25는 올해 1분기 각각 2조1204억원과 2조8549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또 영업이익은 각각 381억원과 583억원을 기록했다. 영업이익이 지난해 같은 기간에 견줘 각각 68.6%와 39.4% 늘어났다.
본사 실적이 좋아진 만큼 편의점 가맹점주들의 살림살이도 나아졌는지는 모르겠다. 본사와 가맹점주 사이의 갑을 관계가 개선됐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가맹점주보다 더 어려운 처지의 또 다른 ‘을’이 있다는 것을 최근 알게 됐다. 편의점에 상품을 공급하는 배송노동자이다. 이들은 상품 분류와 진열 등 공짜 노동을 강요당하는 것은 물론, 아프거나 차 고장으로 어쩔 수 없이 쉬어야 할 때 하루 수십만원의 대체차량 비용까지 부담하고 있다. 참다못한 편의점 배송노동자들이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본부(화물연대)에 가입해 조직화했지만, 다단계 하도급 구조 탓에 원청업체를 직접 만나서 하소연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오히려 원청업체는 대체차량을 투입해 화물연대 조합원들의 저항을 무력화한다.
이 과정에서 지난달 20일 씨유편의점 물류업체인 비지에프로지스의 대체차량에 치여 화물연대 소속 배송노동자 1명이 목숨을 잃고, 2명이 다쳤다. 사고를 낸 대체차량의 운전기사는 회사가 동원한 화물연대 비조합원으로, 조합원들의 집회 현장을 뚫고 상품을 배송하려고 했다. 참담한 희생을 겪고서야 배송노동자들은 원청업체를 만날 수 있었다.
화물연대와 비지에프로지스 대표단은 노동절 전날인 지난달 30일 진주고용노동지청에서 만나 단체합의서에 서명했다. 합의서에는 화물노동자 휴식권 보장을 위한 대차비용 상한 기준 마련, 분기별 유급휴가 1회 부여, 운송료 7% 인상 등 내용이 담겼다. 그런데 양쪽 합의 일주일 뒤, 씨유가맹점주협의회는 화물연대에 140억원 손해배상, 공개 사과, 재발 방지 약속 등을 요구했다. 을과 을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화물연대 조합원 조끼의 왼쪽 가슴에는 “물류를 멈춰 세상을 바꾸자”라는 구호가 적혀 있다. 물류를 멈추기 전까지 정부도, 정치권도, 언론도, 세상 어느 누구도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은 탓에 나온 외침일 것이다. 정녕 이 세상은 억지로 멈춰 세우기 전까지 나아질 수 없는 것일까? 그 과정에서 이 세상은 또 얼마나 많은 희생을 요구할 것인가?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