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22일, 한국예술종합학교를 광주로 옮기자는 법안이 발의됐다. 곧바로 한예종 총학생회와 각계각층의 우려와 반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에스엔에스(SNS)에서는 지난 한 달간 이 문제를 둘러싼 갑론을박이 벌어졌고, 감정적 언사도 자주 등장했다. 결국, 주무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가 이전 논의에 선을 그으면서 논란은 다소 잠잠해졌다.
사실 한예종 이전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2009년 조선왕릉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로 의릉 부지에 들어선 석관동 캠퍼스 이전 논의가 시작된 이후, 송파, 고양, 파주 등으로의 이전 논의가 꾸준히 제기돼 왔다. 다만, 이번 논의가 과거와 달랐던 점은 부처나 청와대의 입장이 아니라, 지역구 목소리를 반영한 국회의원들의 법안 발의에서 촉발됐다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한예종 이전을 추진한 의원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에는 공감한다. 다만 그 밖의 이전 반대 논리와 정서는 한 번쯤 곱씹어 볼 만하다. 한예종 지방 이전 반대론의 한 축에는 지역 역량이 부족하고, 광주에 문화예술 네트워크와 인프라가 없다는 ‘불비론’이 자리하고 있다. 학교를 옮겨와도 이를 둘러싼 생태계가 받쳐주지 못하니, 무의미하다는 주장이다. 이전 반대론의 또 다른 한 축은 ‘이식 불가론’이다. 한예종은 서울이라는 공간에 축적된 예술 생태계에서 작동해 왔기 때문에 이를 지방으로 옮기면 해당 생태계가 약해진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을 세부적으로 뜯어보면, 이미 자생하는 지역의 풀뿌리 문화예술에 대해 충분히 지원하라는 ‘자치 분권파’와 차라리 새로운 기관을 지으라는 ‘신설파’로 갈리기도 한다. 사실 모든 주장이 나름의 근거가 있고, 숙의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강제로 한예종 하나 덜렁 옮긴다고 문화예술계의 지역 불균형을 해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식 불가를 주장하는 사람 중 적지 않은 이들이 “문화예술기관은 제조업처럼 지방으로 옮길 수 있는 게 아니다”라는 주장을 편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들 말대로 제조업을 지방으로 쉽게 옮길 수 있을까? 필자가 지난해 말 투고했던 논문의 제목은 ‘공중부양하는 공장’이다. 쉽게 말해 공장을 특정 지역에 고정해서 세우는 방식이 아니라, 세계 어디든 자유롭게 지을 수 있는 방향으로 산업 구조가 변화하고 있다는 뜻이다. 자동차 공장을 세계 어느 곳에나 지을 수 있고, 부품 공장도 원청을 따라 자원만 갖춰지면 어디든 구축할 수 있다. 모듈화가 잘 돼 있어, 소부장기업이 원청사의 표준과 인터페이스를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자동화와 로봇 기술도 널리 도입돼 생산직 숙련도에 영향을 덜 받게 된 점도 이를 가능하게 하는 요소다.
하지만 이를 두고 ‘제조업 이전이 가능하다’고 해석하는 것은 제조업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결과다. 우선 제조업의 연구개발 기능은 이전하거나 새로 구축하기가 쉽지 않다. 예컨대 현대자동차 남양연구소나 삼성 종합기술원처럼 한 번 구축된 제조업 연구개발 센터는 물리적으로 옮기기도, 동일한 수준으로 신설하기도 어렵다. 데이터베이스를 잘 구축한다 해도 연구직 노동의 인지적 수준의 암묵지 역시 쉽게 대체되지 않는다.
특히 조선소나 반도체 팹의 경우, 이전은 더더욱 쉽지 않다. 문화예술인에게 공연장 인프라가 중요한 것처럼 조선소는 입지가 중요하다. 수심이 깊고 강수량이 적고 만 안에 위치해 태풍을 비켜날 수 있어야 한다. 스코틀랜드 클라이드 강변의 조선소들은 제2차 세계대전까지 세계 조선업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좁은 강폭이라는 자연지리적 제약과 자본 투자의 부진이 겹치면서 확장이 어려워졌고, 인프라 투자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면서 동아시아 조선소들에 주도권을 내주게 되었다. 반도체 공장은 미세한 제품을 생산하는 특성상 지진 위험이 적고, 물과 전기 공급이 안정적인 지역에 들어설 수밖에 없다. 다만, 인력수급도 중요한 요소인 만큼, 용인 반도체클러스터처럼 용수 공급과 송전망 신설 문제에도 우수한 과학기술인력 유치를 명분으로 수도권 입지를 고수하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제조업을 논하는 정책입안자들은 기회가 될 때마다 고부가가치 제조업의 비수도권 이전이나, 새만금 사례처럼 대기업 투자를 통한 신규 고도화 산업단지 구축을 강조한다. 현 정부의 5극3특(권역별 메가시티)·지방주도성장·9개 거점국립대 강화 정책 역시, 이런 방향성과 궤를 같이한다. 이는 더는 수도권 팽창을 국토가 감당하기 어렵다는 인식과 맞닿아 있고, 이에 따른 부담을 결국 대한민국 미래 세대가 떠안게 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수도권의 첨단 제조업 역시 막대한 투자와 제도적 특혜를 통해 발전해왔다. 매출액 상위 100대 기업 중 86개의 본사가 수도권에 몰려있다. 법인 영업잉여의 65%, 재산소득의 70%도 수도권에 편중돼 있다. 반면, 비수도권에 들어서는 시설들은 자동화로 인해 양질의 생산직 일자리를 창출하는 데 한계가 있거나, 연구개발 기능이 부족해 대졸 일자리 역시 제한적인 경우가 많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제조업을 통한 균형발전 측면에서 시사점을 주는 지역은 바로 대구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을 운영해 거부가 된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있고, 중화학공업화로 대표되는 산업화·근대화 프로젝트를 수행한 박정희의 상징적인 지역 아닌가. 대구는 제조업 도시였다. 1970~90년대까지 대구는 섬유산업으로 부흥했고, 대구 여성 열에 일곱은 섬유 관련 직무에서 일했다. 그러나 대구의 섬유산업은 최종생산에 국한됐고, 본사는 물론 연구개발 기능을 보유하지 못했다. 그 가운데 동남아시아와 중국의 저임금 물량 공세 속에 생산이 위축됐다. 지역 관점에서 산업 다각화를 위해 추진되던 삼성상용차 공장은 법정관리에 들어가 최종 파산했고, 성서 공단 등에서 기계금속 등의 다변화를 시도했지만 10인 이하 기업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영세성을 면하지 못했다. 대기업의 생산하청을 수행하는 지역, 저부가가치 범용재를 납품하는 소부장기업을 통해서는 청년들이 희망하는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지 못한다. 수치는 그것을 잘 보여준다. 대구의 1인당 지역 내 총생산(GRDP)은 1990년 4백만원 수준에서 2024년 3137만 원으로 올랐지만, 광역시·도 16곳 중 최하위 자리를 30년째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인구는 1995년 247만명으로 정점을 찍은 뒤 2024년 236만명으로 줄었고, 그중에서도 대구 서구는 1992년 38만명에서 2024년 16만명으로 30년간 57%나 감소했다.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를 제외하면, 정치적 중요성 때문에 중앙·지방 정치가 가장 기민하게 ‘전환’에 개입했던 곳도 대구다. 1999년 김대중 정부와 문희갑 대구시장이 6800억원짜리 ‘밀라노 프로젝트’를 띄웠다. 단순 생산 중심 구조에 머물던 대구 섬유산업을 패션·디자인·연구개발 기반의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전환하기 위해 추진된 지역 산업 고도화 사업이었다. 섬유 생산기지를 넘어서, 지역의 제조업 생산방식이 소품종 대량생산에서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저부가가치에서 고부가가치로 전환해야 한다는 당시 진단은 타당했다. 연구개발(R&D), 제품 설계 등 ‘구상 기능’도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자금의 대부분은 다이텍, 한국패션산업연구원, 텍스타일콤플렉스 같은 건물에 들어갔다. 실질적인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연구개발 활동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거버넌스 설계와 조정 모두 작동하지 않았다. 대구 소재 섬유개발연구원과 염색기술연구소가 갈등을 빚었고, 견직물조합과 직물조합도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충돌했다. 시장은 단체장 인사에 개입했다. 2005년 감사원 감사 이후 프로젝트 권한을 중앙정부(산업자원부)가 회수했다. 이후 대구 경제 살리기를 위해 1986억을 메카트로닉스·한방·모바일 산업에 투자했지만, 이 역시도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대구는 한때 ‘모바일 시티’, ‘메디시티’, ‘물 산업 도시’를 내세웠고, 최근에는 로봇 산업 육성에 힘을 쏟고 있지만, 어느 산업도 지역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
대구는 현재 영세 서비스산업을 통해서 유지되는 도시가 됐다. 쇠퇴하는 비수도권 도시의 공통된 특징 가운데 하나는 건설·유통업 외에는 토착 자본이 성장하지 못한다는 점인데, 근대화 초기 수많은 산업 자본가를 배출했던 대구조차 이런 흐름을 비껴가지 못했다. 수도권의 인구 비중은 2004년 47.8%에서 2024년 50.9%로 3.1%포인트 늘었지만, 같은 기간 비수도권 안에서도 성장거점 20개 시·군·구의 비중은 9.4%에서 18.5%로 거의 두 배가 됐다. 대구는 광역시 행정구역상으로는 여전히 큰 도시이지만, 이 20개 성장거점에 들지 못한다. 대구의 인구 패턴은 역시 인구가 줄고 있는 부산 등과 비교해도 청년층의 누적 유출과 자치구 단위 양극화에서 도드라진다. 그 원인에 일자리 부족이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번 6·3 지방선거의 최대 관전 포인트 중 하나는 보수 텃밭 대구의 표심이 어디로 향할 지다. 현재 여야 후보가 오차범위 내에서 접전을 벌이고 있다. 1995년 지방자치제 도입 이후 대구에서 여야 박빙 구조가 형성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부겸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보수정당에 수십 년 표를 몰아준 결과 지역 경제가 이렇게 쇠퇴했다며, 정치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김 후보는 5500억원 규모의 ‘인공지능·로봇·양자’ 클러스터와 1250억원 규모의 청년펀드를 들고 ‘청년 기회 도시’를 내걸었다. 추경호 국민의힘 후보는 ‘인공지능·로봇·미래모빌리티·바이오·반도체’와 1조원 규모의 창업펀드, 제2 반도체 클러스터, 대구·경북(TK) 신공항 공약을 내세우며 ‘대구 경제 대개조’를 외치고 있다. 사실상 공약만으로는 두 후보의 분명한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다. 첨단산업의 유치, 신사업 발굴로 끝이 나는 게 아니다. 첨단산업의 생산하청 기지라면 대구·경북이 달라질 수 없다. 미래를 위해 대구·경북 관점에서 구상 기능을 확보하고, 우수한 과학기술자들을 네트워크로 촘촘하게 엮고, 정주 여건이 마련될 수 있도록 주거와 교육 인프라를 적시에 제대로 공급해야 한다. 국민성장펀드로 대표되는 지방주도성장을 위한 생산적 금융과 대구의 창업이 어떻게 연결될지에 관해서도 응답해야 한다. 정치적 독점 구도 속에 산업적 번영에 실패하는 실험을 누적해 온 대구는 이번에는 달라질 수 있을까?
양승훈 경남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