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홍진이면 무조건 한다고 했지만 대본을 받아보고는 ‘나홍진이 에스에프를 한다고?’ 이랬죠.”
‘곡성’ 이후 10년 만에 ‘호프’에서 다시 나홍진 감독과 의기투합한 배우 황정민이 말했다. 18일(현지시각) 프랑스 칸의 한 호텔에서 만난 황정민은 “감독님과의 작업이 불편한지는 모르겠는데 처음 해보는 크리처물이 어려웠다”고 말했다. 그가 끌고 가는 초반 한시간이 너무나 뛰어나서 “어렵다”는 말은 엄살처럼 들리기도 했다. 황정민은 “지금까지는 상대방의 눈을 보고 쌓아가는 연기를 해왔는데, 맨땅에 헤딩하듯 상상하며 혼자 관객을 끌고 가는 게 부담스럽고 힘들었다”며 “외계인의 얼굴이 등장할 때 바통 터치하는 기분이었다. 그 장면 이후로 좀 편해졌다”고 촬영 당시를 떠올렸다.

황정민은 호포항 파출소장을 연기한다. 정의감에 불타는 영웅적 인물과는 거리가 멀지만 공포에 떨면서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책임감 강한 인물이다. 그는 후반 클라이맥스에서 영화 속 유일한 정적인 장면을 연기하는데, 그가 초반에 보여준 다양한 액션을 잊을 만큼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이 역시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곳을 보며 연기했지만 “문득 외계인의 얼굴을 보면서 ‘나도 무섭지만 저 외계인도 두려워하는구나’ 하는 범석의 깨달음을 짧은 순간 보여줘야 했기 때문에 가장 많은 고민을 했다”고 전했다.
나 감독과의 10년 만의 작업에 대해 그는 “그 끝없는 집요함을 익히 알고 있어서 영화가 재밌게 잘 나올 것이라고 처음부터 생각했지만 ‘곡성’ 때와는 또 달랐다”고 했다. “‘곡성’ 때는 작업하면서 쫓기는 듯한 느낌과 불안함이 좀 있었는데, 이번 현장은 여유가 느껴졌어요. 촬영할 때 얼굴도 좋았는데, 이번에는 후반 작업 때 썩어있더라고요.(웃음)”
황정민은 “빨리 한국 가서 관객과 같이 영화를 보고 싶다”고 했다. “영화의 많은 유머나 대사의 뉘앙스가 한국인들만 이해하고 웃을 수 있는 것들이 많고 배경인 마을 골목도 한국 특유의 정취가 있는 공간이라 한국 극장에서 함께 낄낄대며 보면 훨씬 더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조인성은 칸에 오기 직전 후시 녹음을 또 하고 왔다. 숨소리만 후시 녹음을 한 것도 여러번이다. “이렇게 후시 녹음을 많이 한 건 연기 생활 28년 만에 처음”이라고 할 정도로 그 역시 나 감독의 집요함을 제대로 경험했다. 황정민이 영화의 서사를 끌고 가는 역할이라면, 조인성은 턱이 떡 벌어지게 하는 화려한 액션을 보여준다. 깊은 침엽수림에서 말을 달리거나 달리는 말에서 자동차로 옮겨 타는 장면 등은 헉 소리가 나올 만큼 아름답고 숨통을 조일 만큼 아슬아슬하다. 더미를 활용한 장면 하나 없이 직접 달리고 직접 뛰어내리며 완성한 장면들이다.
그는 전날 뤼미에르대극장에서 ‘호프’의 관객 반응을 보면서 “내 일이 아니라 옆집 일을 보듯 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레드카펫의 환호나 극장에서 나오는 박수는 작품 자체에 대한 평가라기보다 영화를 존중하는 이곳의 문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곳을 즐기려면 좀 거리감을 두는 게 더 좋을 거 같아서 옆집 일처럼 생각하려고 했어요.”
그가 연기하는 성기는 마을 청년이라는 설정 외에 구체적인 직업도, 사연도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성기를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사람이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만나면 돌아가든지, 죽음을 불사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알리든지, 두가지라고 하더라고요. 성기는 후자로, 목숨을 걸 때 에너지가 나오는 인물이죠.”
나 감독의 완벽주의와 집요함 때문에 쉽지 않은 현장이었지만, 그는 “불편한 지점까지 나를 끌어내야 배우로서 쓰임새가 더 늘어날 수 있어 기회가 오면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아직 연기적으로 더 몰아쳐볼 수 있는 기회가 오는 건 영광이죠. 칸 레드카펫도 영광이지만 좋은 감독님들과 작업할 수 있는 게 저한테는 훨씬 더 큰 행복입니다.”

칸에서 만난 정호연은 ‘호프’가 영화 데뷔작이다. 연기 데뷔작은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다. 영화가 처음 공개된 뤼미에르대극장 상영에서 정호연이 총을 들고 순찰차에서 내리며 화면에 처음 등장하는 순간 객석에서는 큰 박수가 쏟아졌다. 이렇게 화려한 등장이 또 있을까?
“그 장면에서 환호가 나올 때 응원받는 받는 기분이었어요.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쳐주는 박수로 감동도 두배였어요.”
그는 ‘호프’를 찍으면서 ‘이런 화면에 내가 들어갈 수 있다니, 이런 미술에 내가 존재해도 된다니’를 계속 떠올릴 정도로 모든 순간이 떨리고 감격적이었다고 말하면서 “신인으로 완벽주의자 감독을 만난 건 정말 큰 축복”이라고 했다. 그는 “카체이싱 장면을 처음 찍던 날, 수많은 안전 체크와 무술팀·기술팀이 알려주는 여러 기술적 이야기들을 입력하면서 머릿속 퓨즈가 나가버린 느낌이었는데, 옆에 있던 황정민 선배가 ‘호연아, 자신감 있게 해’라고 말해주셨다. 그 순간 머릿속이 맑아지면서 첫 테이크에 오케이가 났다”고 떠올리고는 “첫 영화를 통해 내 안에 남은 게 너무 많아서 그것만으로도 나는 진짜 운이 좋은 배우라고 생각한다”고 소감을 말했다.
칸/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