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프’는 지나치게 착한 영화라고 생각하면서 찍었습니다.”
전작들이 무색할 정도로 마을 전체가 피에 물들고 주요 인물들은 숨쉬듯 욕을 내뱉는 ‘호프’에 대해 나홍진 감독은 18일(현지시각) 프랑스 칸 팔레드페스티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반어적인 유머로 가득한 ‘호프’의 화법과 닮았다. 그는 기자회견 직후 인근 한 호텔에서 열린 한국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부연 설명을 했다.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 중에는 ‘안타고니스트(적대자)는 없다’는 메시지도 있어요. 누구에게나 사연이 있고 다른 입장이 있다는 의미에서 착한 영화라고 느꼈습니다.”
17일 밤 칸에서 처음 공개된 ‘호프’는 충돌하는 에너지로 가득한 영화다. 198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한적한 시골 동네에 괴물처럼 보이는 외계인이 등장하고, 말 탄 사람과 낡은 경찰차, 거대 외계인이 서로 쫓고 쫓기며 언제 주인공을 덮칠지 모르는 공격에 조마조마해지는 긴장감 사이로 어눌한 말투의 유머가 수시로 치고 들어온다. 나 감독은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든 크리처가 등장하지만 오래전에 본 듯한 액션과 배우들의 연기가 강렬한 원시적인 느낌의 영화이길 바랐다”고 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가상의 마을 호포항은 휴전선 근처 비무장지대(DMZ) 어딘가로 설정돼 있다. 나 감독은 현대사나 분단 현실의 반영과는 큰 관계가 없다면서 “아주 작고 초라한 마을에서 우주로 이야기가 확장되는 그 간극을 보여주기 위해 낙후되고 고립된 마을로 디엠제트를 가져왔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 여기저기 붙어있는 반공 표어는 영화 속 마을 사람들과 남한 사회가 오랫동안 상정해온 ‘적’의 실체에 대한 은유로 읽히는 게 이 영화의 흥미로운 지점 중 하나다.

그가 ‘곡성’ 이후 10년 만에 내놓은 ‘호프’의 출발점은 ‘불길함’이었다. 나 감독은 “전세계적으로 전쟁 위험도 커지고 엄청난 폭력이 무자비하게 온 세상을 뒤덮을 것 같은 불길함이 세상을 더 많이 지배하게 된 것 같다”며 “‘호프’는 세상의 크고 작은 문제와 폭력 같은 비극적인 일들이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커지는가를 이야기하는 영화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영화는 범석(황정민)이 마을을 초토화시킨 괴물을 죽이기 위해 분투하는 전반과 괴물의 실체가 드러나며 마을 밖에서 싸우는 후반으로 나뉜다. 외계인이 등장하지만 그 실체가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시간은 길지 않다. 속편을 위한 포석처럼 보인다. 나 감독은 “속편이 만들어지면 좋겠고, 이를 위한 이야기도 구상해놓긴 했지만, ‘호프’를 전편이나 3부작의 1부로 생각하고 만들지는 않았다”며 “오랫동안 구상한 방대한 이야기의 압축판 정도로 생각하고 보실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영화감독이라면 모두 각자의 완벽함을 추구하기 마련이지만, 나 감독의 집요함은 영화계에서 특히 유명하다. ‘곡성’ 이후 신작 ‘호프’를 내놓기까지 10년이나 걸린 점도 그렇지만, 후반 작업을 유난히 길게 이어간 탓에 17일 상영 직전까지도 정보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점도 그렇다. 그는 첫 공식 상영을 보면서도 “미진하고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더 많이 보였다”며 “영화가 끝나고 제작팀과 밤샘 회의를 해서 지금도 후반 작업을 계속 하고 있다”고 말했다. 개봉 예정인 7월까지 두달가량 남아있어 칸 버전과는 또 다른 영화를 만날 것이라는 게 나 감독의 귀띔이다.

장편 데뷔작 ‘추격자’로 2008년 미드나이트 스크리닝 부문에 초대받은 뒤, ‘황해’는 2011년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곡성’이 2016년 비경쟁 부문에 초청되며 모든 연출작이 칸 레드카펫을 밟았다. 영화제의 꽃이라고 할 경쟁 부문은 이번이 첫 입성이다. 수상을 기대하냐는 질문에 나 감독은 “경쟁작 리스트에 올랐다는 것 자체가 영광스럽고 감사할 뿐”이라며 미소를 지었다. 결과는 오는 23일 저녁 열리는 제79회 칸국제영화제 폐막식에서 공개된다.
칸/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