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재호 | 한국외대 EU융합전공 겸임교수
또다시 개헌 논의가 무산됐다. 권력구조 개편 등 논쟁적인 사안은 배제하고, 계엄 선포 시 국회 승인 의무화와 절차를 강화하는 최소 수준의 내용으로 구성했음에도 그렇다.
그러나 이번 개헌 무산을 단순히 실패나 비극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어쩌면 지금 한국 민주주의에서 헌법 개정보다 더 시급한 과제는, 정치를 매일 작동시키는 실질적인 ‘알고리즘'을 바로잡는 일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헌법이 국가 운영체제의 골격이라면, 그 시스템을 가동하는 소프트웨어는 정당법과 선거법이다. 아무리 뼈대를 튼튼하게 고쳐도, 보상 체계(알고리즘)가 ‘적대’와 ‘증오’를 유인하도록 설계되어 있다면 정치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헌법 전문에 민주화운동 정신을 명시한다고 팬덤 정치가 약화하고, 계엄 통제를 강화한다고 극한 대립이 멈추지는 않는다. 오늘날 한국 정치의 진짜 위기는 권력 구조 자체보다 사회적 적대의 제도화에 있다. 정치인들이 상대를 경쟁자가 아닌 ‘제거해야 할 적’으로 간주하는 이유는 그들의 성정 때문이 아니다. 현행 선거법과 정당법 체제에서는 증오를 동력 삼는 것이 가장 유리한 생존 전략이기 때문이다.
먼저 선거법의 맹점을 보자. 단 한 표라도 더 얻으면 모든 것을 가져가는 소선거구제는 정치인을 진영의 전사로 만든다. 중도층을 설득하는 고단한 길보다 강성 지지층의 분노를 자극해 결집시키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상대를 악마화할수록 지지가 상승하고, 타협을 시도하면 내부의 배신자로 낙인찍힌다. 결국 선거는 정책 경쟁의 장이 아니라 적대 동원의 전쟁터가 된다.
따라서 선거제도 개혁의 핵심은 승자독식의 완화와 비례성의 강화에 있어야 한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실질화하고 위성정당이라는 편법을 원천 차단해야 한다. 정치인이 상대를 공격할 때보다 연합하고 협상할 때 더 큰 보상을 얻도록 게임의 규칙 자체를 재설계해야 하는 것이다.
정당법 역시 혁신이 필요하다. 현재의 정당은 시민의 자발적 결사체라기보다 대권만을 향해 달려가는 선거 동원 기구에 가깝다. 권한은 중앙당에 집중되어 있고, 당내 민주주의는 실종된 채 강성 팬덤이 의사 결정을 주도한다. 정당이 갈등을 조정하는 플랫폼이 아니라 진영 간 전투를 수행하는 병영처럼 작동하는 이유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정당을 다시 시민의 품으로 돌려줘야 한다. 지역 정당 설립을 허용해 정치적 다양성을 확보하고, 공천 절차를 투명하게 관리하며, 일상적인 정책 숙의를 제도화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선거날에만 반짝하는 이벤트가 아니라, 정당 내부에서 매일 훈련되는 습관이자 매일의 버릇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개헌이 ‘제왕적 대통령제 타파’나 ‘87년 체제의 극복’이라는 명분으로 호출되어 온 건 하루아침이 아니다. 승자독식의 권력 구조를 바꾸기 위해 4년 중임제나 이원집정부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분명 일리가 있다. 그러나 권력의 꼭대기만 손본다고 해서 한국 민주주의를 병들게 하는 적대적 정치 문화가 사라질까?
물론 개헌이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개헌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는 너무 순진하다. 정치의 생존 규칙이 그대로인 한, 어떤 헌법도 적대 정치를 막지 못한다. 제도가 사람의 인성과 행태를 완전히 바꿀 수는 없지만, 적어도 어떤 행동이 더 많은 보상을 받을지는 예측하게 할 수 있다.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한다. 대통령에게 얼마만큼의 권한을 줄 것인가가 아니라, “왜 우리 정치인은 상대를 적으로 만들어야만 살아남는가?”를 물어야 한다. 진짜 개혁은 가장 낮은 곳의 규칙을 바꾸는 용기에서 비롯된다. 한국 민주주의의 혁신은 헌법 조문이라는 간판이 아니라, 정당과 선거라는 밑바닥의 알고리즘을 바꾸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재명 정부는 진정 개헌에 진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