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짧은 영상에 익숙해 약어·줄임말 일상화
어휘력·문장력 넘어 문해력에도 악영향
교과서에 낙서 빼곡…지시에 엉뚱한 반응
반항·게으름 아닌 어휘력 문제 의심해야
미취학·초등 저학년엔 전래동화 들려주기
고학년은 뉴스 학습…라디오·오디오북 효과적
수업 중 교과서에 낙서를 하는 아이, 설명을 다 들었는데도 엉뚱하게 행동하는 아이, 조금만 글이 길어져도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 아이. 어휘력 부족이 학습 이해력을 떨어뜨리고, 감정 표현과 더 나아가 또래 관계까지 흔들고 있다는 게 교육 현장의 진단이다. ‘초등 공부 1등 어휘’를 펴낸 김선호 교사(서울 유석초)에게 아이의 어휘력을 진단하고 키우는 방법을 물었다.
–어휘력이 낮아지고 있다는 이야기, 교육 현장에서도 체감하나
분명히 느낀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아이들이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 끝맺음이 없다는 점이다. 주어도 없고, 서술어가 빠진 채 목적어만 던지는 식이다. 짧은 영상 콘텐츠에 익숙해지면서 약어와 줄임말이 일상화된 탓이다. 이게 어휘력과 문장력을 넘어 문해력 전반에 영향을 준다.
수업에서는 초등 저학년부터 바로 드러난다. 모르는 단어가 하나 나오는 순간 이해의 흐름이 끊겨버리고, 아이들은 교과서에 그림을 그리며 딴짓을 하기 시작한다. 1~2학년 교과서에 낙서가 빼곡하다면 수업 이해가 안 된다는 신호다. 보호자가 분명히 설명했는데 아이가 엉뚱하게 행동하거나 계속 미룰 때도 마찬가지다. 반항이나 게으름이 아니라 어휘력 문제일 수 있다는 걸 한번쯤 떠올려봐야 한다.
–어휘력 부족은 학업 외에 일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
정서 발달과도 직결된다. 아이들이 감정을 느끼는 건 다 한다. 그런데 그 감정을 적절한 어휘로 표현하지 못하면 ‘이해’의 단계로 넘어갈 수 없다. 지금 우울한 건지, 불안한 건지, 단순히 짜증이 난 건지를 스스로 구별하려면 그 감정에 해당하는 단어를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부모 눈에는 그냥 ‘화를 잘 낸다’고 보이지만, 사실은 감정이 어휘로 풀리지 않아서 쌓여 있는 것이다. 억울한 일이 있어도 말로 설명하지 못하니 관계도 어렵다.
–책에 핵심 어휘 500개를 교과별로 담았는데, 선별 기준이 무엇인가
두 가지 기준을 적용했다. 첫 번째는 교과 성취 기준이다. 각 교과의 학습 목표와 평가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어휘들을 우선적으로 담았다. 두 번째는 교과 전용 어휘다. 과학 교과의 ‘남중고도’ ‘용해’ ‘용질’ 같은 단어들은 일상에서는 거의 쓰지 않지만 해당 교과에서는 핵심 개념이다. 이런 어휘를 모르면 아무리 수업을 들어도 이해가 안 된다.

–책에 한자 풀이 코너도 있다. 어휘 학습에서 한자가 왜 중요하고, 어떻게 접근하면 좋은가
우리가 쓰는 어휘의 상당수가 한자로 구성되어 있어서, 한자를 알면 같은 발음이지만 다른 의미를 가진 단어들을 바로 구별할 수 있다. ‘경기’라는 단어를 들으면 아이들은 대부분 축구 경기만 떠올리지만, 사회 교과에서는 ‘경제 경기’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인다. 한자를 알면 바로 알아챌 수 있는데, 한글로만 보면 같은 단어로 착각하고 넘어가기 쉽다.
접근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냥 외우게 하는 것이 가장 빠르다. 초등 1~3학년의 암기력은 정말 뛰어나다. 한자 카드를 활용하면 5분에 열 자 정도는 거뜬히 훑을 수 있고, 몇 번 반복하면 한 달에 100자는 어렵지 않다. 보호자가 카드를 뒤집어놓고 게임처럼 함께 하면 아이들이 훨씬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교재 없이 일상에서 어휘력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미취학이나 초등 저학년이라면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는 게 가장 좋다. 할머니·할아버지가 전래 동화나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던 것처럼, 구전 동화 방식으로 실감 나게 이야기해주는 거다. 고학년이 되면 소재가 뉴스로 확장되어야 한다. “오늘 뉴스에서 부동산 얘기가 나왔는데, 부동산이 뭔지 알아?” 이런 식으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아이 눈높이에서 풀어주는 거다. 디지털 환경에서는 영상보다 라디오나 오디오북이 효과적이다. 소리만 있으면 말 자체에 집중할 수밖에 없고, 어휘를 통해 이해하는 훈련이 자연스럽게 된다.
가장 경계해야 할 건 오개념이다. 잘 모르는 단어를 대충 설명해주거나 긴가민가한 채로 넘어가면 안 된다. 한번 잘못 박힌 개념은 바로잡기가 정말 어렵다. 모르면 “나도 모르겠는데, 같이 찾아볼까?”라고 하는 게 훨씬 낫다. 질문을 막는 분위기도 문제다. “왜 이런 것도 몰라” “그냥 외워” 같은 반응이 쌓이면 아이는 질문을 하지 않게 된다.
–연령에 따라 어휘 지도에서 달리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있나
어휘력 격차는 두 살 무렵부터 벌어지기 시작한다. 어릴 때 얼마나 많이 들었느냐가 중요한 이유다. 초등 저학년에서는 소리 내어 읽기가 핵심이다. 어휘는 듣기를 통해 뇌에 각인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글을 띄어쓰기 없이 읽는다면 내용을 모르는 채로 그냥 넘어가는 것이다. 고학년으로 올라가면 줄글 책으로 확장해야 한다. 학습 만화는 그림이 어휘 이해를 대신해주기 때문에 추상 어휘를 습득하기 어렵고, 이 어휘가 없으면 논리적·추상적 사고도 확장되지 않는다.

–어휘력이 또래보다 많이 뒤처지는 아이는 어떻게 도와줄 수 있나
원인과 무관하게 공통적으로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 잠들기 전 20~30분, 아이가 좋아할 만한 책을 읽어주는 거다. 잠자리에 드는 시간은 무의식이 깨어나는 시간이다. 조명을 약간 어둡게 하고 포근한 분위기에서 보호자가 이야기를 들려주면, 그 어휘와 감정이 무의식에 그대로 남은 채로 잠이 든다. 다음날 또 그 시간을 기다리게 되고, 책과 언어에 대한 긍정적인 감정이 쌓이면서 어휘력도 올라간다.
–어휘력에 관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어휘력은 목적이 아니라 기본이다. 학습력뿐 아니라 관계성과 사고 확장, 이 모든 것의 기반이다. 감정을 말로 풀지 못하는 아이, 억울한 일을 그냥 안고 가는 아이, 새로운 개념 앞에서 멈춰버리는 아이. 이 문제들이 모두 어휘에서 비롯된다. 어휘력을 높이겠다고 아이를 다그치거나 학습지를 쏟아붓는 것보다, 일상 대화를 풍성하게 하고 잠들기 전에 책 한 권을 함께 읽는 것이 훨씬 더 깊고 오래가는 변화를 만든다. 어휘력은 결국 아이가 세상과 만나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박은아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