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법, 시민의회서 만들자 [왜냐면]

지방선거 투표.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오현철 | 전북대 교수(정치학)

한국 정치는 소선거구 승자독식 체제 속에서 거대 양당 중심의 적대 정치로 굳어졌다. 유권자는 ‘좋아서’가 아니라 ‘덜 싫어서’ 투표하고, 정당은 상대를 악마화할수록 지지층을 결집시킨다. 시민들은 처음에는 분노하여 광장에 나오지만 그 열정은 어느 순간부터 한국 정치에 대한 탄식으로 바뀐다. 정치 냉소는 무관심으로 굳고, 극단 세력이 활개친다. 합리적 중간 지대가 정치 지형에서 소멸한다. 다수결은 작동하지만 소수의 목소리가 봉쇄된 체제, 국회는 열리지만 실질적 토의가 사라진 체제가 기다린다.

왜 바뀌지 않는가. 선거법을 바꿀 권한을 가진 국회의원들이 바로 현행 제도의 최대 수혜자이기 때문이다. 국민이 주권자라면 선거법은 국민이 주도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대리인인 국회의원들이 자기 고용 조건을 스스로 정하는 구조다.

2020년 준연동형 비례제가 위성정당으로 무력화된 사례는 국회가 자기 이익에 반하는 선거제 개혁을 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선거법 개혁을 국회에 맡기는 방식은 구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디서 해결 방안을 찾아야 하는가. 답은 ‘시민의회’에 있다. 2004년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BC)주는 세계 최초로 시민의회에 선거법 입안 권한을 부여하였다. 160명의 무작위 추첨 시민으로 구성된 이 의회는 약 1년에 걸쳐 각종 선거제도를 학습하고 50여차례 공청회를 개최한 뒤, 기존 선거제도를 대체할 새로운 선거법안을 직접 작성했다.

주 정부는 이를 위해 550만캐나다달러(약 60억원)의 공공 예산을 배정했다. 전문 정치인도, 특정 이해관계자도 아닌 평범한 시민들이 공익 관점에서 선거제도를 설계한 것이다. 그 결과물은 주민투표에 부쳐졌고, 2005년 투표에서 79개 선거구 중 77곳에서 다수 지지를 얻었다. 이 실험은 이후 아일랜드, 캐나다 온타리오, 오스트레일리아 등 전세계 시민의회 운동에 결정적 영감을 주었다.

한국도 시민의회를 구성하여 선거법안을 작성해야 한다. 그 이유는 세가지다. 첫째, 시민의회는 국회의원들의 ‘이해충돌’로부터 자유롭다. 무작위로 선발된 보통 시민들은 현행 선거제도를 지킬 기득권이 없다. 오직 공정하고 민주적인 가치를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다. 둘째, 시민의회는 시민들의 토론을 통해 심사숙고한 결과를 제도화한다. 전문가 강의, 공개 토론, 시민 의견 수렴을 거치는 과정에서 단순한 여론보다 질적으로 높은 수준의 공론이 형성된다. 셋째, 시민의회는 교착 상태를 돌파하는 우회로다. 시민의회가 작성한 법안을 사회적 압력의 원천으로 활용하고 궁극적으로 국민투표 등의 경로를 통해 제도화하는 방안을 모색할 수 있다.

시민의회는 특정 주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의견을 모으는 임의의 ‘캠페인’이 아니다. 공적인 결정을 내린다는 점에서 배심원 재판에 가깝다.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무작위로 소환된 시민들이, 충분한 정보와 토의를 거친 뒤, 공익 관점에서 공정한 판단을 내리는 과정이다. 이를 제대로 작동시키려면 참여자에 대한 적정 수당과 교통·숙박비 지원, 다양한 전문가 집단의 교육 및 자문, 전국 규모의 공청회 운영이 필요하다. 재정 지원이 없는 경우에는 시민의회가 시간과 경제적 여유가 있는 계층으로 구성될 위험이 있고, 무작위 추첨이 보장해야 할 ‘대표성’을 보장하기 어렵다. 정부 예산 지원은 시민의회의 작동 조건이다.

민주주의 운영에 드는 비용은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 선관위 운영비, 정당 보조금, 국회의원 세비를 모두 세금으로 충당하듯 민주적 의사결정 체계의 일환인 시민의회도 예외일 수 없다. 시민의회가 특정 재단이나 단체의 후원으로 운영된다면, 특정 세력이 배후에 있는 정치 공작이라는 비판을 받을 것이다. 정부가 예산을 공개적으로 배정하고, 중립적인 공공기관이 시민의회 운영을 관리할 때 비로소 그 과정과 결과는 정파적 공격으로부터 방어될 수 있다.

시민의회에 드는 비용은 손실이 아니라 사회적 절감이다. 선거제도의 왜곡이 야기하는 사회적 비용을 생각해보라. 극단적 양당 구도가 조장하는 정치적 갈등, 그로 인한 입법 교착과 국정 공백, 혐오와 적대가 증폭되는 정치 문화, 이것들은 수치화하기 어렵지만 분명히 실재하는 비용과 손실이다. 시민의회가 선거법 개혁의 물꼬를 튼다면, 그 사회적 편익은 운영 예산의 수백배를 넘을 것이다.

시민의회 결과가 즉시 법이 되지 않더라도, 주권자인 시민들이 직접 토의하여 만들어낸 선거법안이 공개되는 순간 그것은 선거의 민주적 기준이 되고, 적대 정치에서 인정 정치로 넘어가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국가는 시민이 민주주의 설계자로 나설 공간을 열어야 하고, 예산 지원은 그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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