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이름이었다. 마지막 조도 아니었다. 세계 랭킹 44위의 선수. 그동안 메이저 대회에서 15위 안에 든 적도 없었다. 그런데 결정적 순간, 가장 침착했던 사람은 에런 라이(31·잉글랜드)였다.
17번 홀에서였다. 21m 버디 퍼트가 천천히 굴러 내려갔다. 갤러리의 함성이 먼저 터져 나왔고, 공은 마치 예정된 결말처럼 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미국 언론은 이를 두고 “혼돈 속에서 나온 결정적 한 방”이라 칭했고, 영국 언론은 “1919년 이후 처음 나온 잉글랜드 출신 피지에이(PGA) 챔피언”이라고 환호했다. 라이는 앞서 9번 홀(파5)에서 12m 거리의 이글 퍼트도 성공한 터였다.
2026 PGA 챔피언십은 그야말로 난전이었다. 최종 라운드를 앞두고 우승 가능권 선수가 20명이 넘었다. 그중에는 욘 람(스페인)도 있었고, 로리 매킬로이(북아일랜드)도 있었다. 이름값으로만 보면 라이의 우승 가능성은 가장 낮았다. 하지만 18일(한국시각)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뉴타운 스퀘어의 애러니밍크 골프 클럽(파70)에서 가장 마지막에 웃은 이는 라이였다. 그는 1919년 짐 바네스 이후 107년 만에 PGA 챔피언십을 제패한 잉글랜드 출신 골퍼가 되었다.
라이는 최종 라운드에서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뒤로 갈수록 더 정교해졌다. 마지막 10개 홀에서 이글 1개, 버디 4개를 쓸어담았다. 이날만 5타를 줄이면서 최종 성적은 9언더파 271타. 욘 람 등 공동 2위권과는 3타 차이가 났다. 영국 ‘가디언’은 “조용하고 차분했던 선수가 결국 대회를 지배했다”고 표현했다. 우승 상금은 369만달러(약 55억원).
라이는 선수들의 존경은 받았으나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선수다. DP월드투어에서는 3승을 올렸으나 PGA투어 첫 승은 지난 2024년 윈덤 챔피언십에서 처음 거뒀다. 그는 두 손에 검은색 장갑을 끼고, 시합 중에도 항상 아이언 헤드에 커버를 씌우는 독특한 습관으로 더 유명하다. 영국 추운 날씨 속에 어릴 적 두 손 장갑을 끼고 연습했던 것을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오고 있다. 아이언 헤드 커버는 아들을 골프 선수로 키우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아버지에 대한 존경이 담겨 있다. 아버지는 전 재산을 쪼개 아들에게 경기용 아이언 세트를 사주었고, 연습이 끝날 때마다 골프채를 닦고 커버를 씌우며 소중히 다뤘다. 라이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기억하고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하기 위해” 아이언 커버를 씌워둔 채 사용한다고 밝힌 바 있다.
PGA 챔피언십 우승으로 라이는 랭킹 포인트 100점을 획득해 세계 15위까지 순위가 상승한다. 개인 역대 최고 랭킹(20위)을 경신한다. 라이는 우승 직후 “정말 초현실적이다. 이번 시즌 다소 답답한 흐름이 이어졌는데, 여기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고 서 있다는 것은 내 모든 상상 그 이상”이라고 밝혔다. 그는 더불어 “골프는 겸손과 규율, 그리고 절대적인 노력을 가르쳐주는 놀라운 스포츠다. 이 게임에서 거저 주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도 했다. 피지에이투어닷컴은 “일요일에 라이는 아무것도 거저 얻은 것이 없었다. 그는 골프계 최강의 선수들을 상대로 뛰어난 기량을 선보이며 우승했다”고 전했다.
김양희 기자 whizzer4@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