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격수의 강단에 새긴 어머니의 상실 울음과 침묵 사이를 채운 연기의 깊이

tvN 토일드라마 '100일의 거짓말'에서 소란은 항일단체 구국단의 저격수다. 딸을 죽인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사토 신이치(진선규)에게 복수하기 위해 13년간 칼을 갈며 숨죽여 살아온 인물이다. 조선계 미국인 기자 유필립(이무생)과 부부로 위장해 경성에 돌아온 그에게 사토 암살은 임무이자 삶의 마지막 목적이다. 그 너머의 내일은 생각하지 않는다.
이 단호함을 이해하게 하는 것은 과거의 절규다. 남편이 함께 항일 운동을 한 동료들의 이름을 대지 않자 일본 군인들은 어린 딸을 소란의 눈앞에서 쏴 죽인다. 김현주는 아이를 지키지 못한 어머니의 무너짐을 처절하게 드러낸다. 그 과거를 알고 나면 현재의 침착함조차 오래 눌러둔 비명처럼 읽힌다. 감정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더는 밖으로 쏟아내지 못하게 된 사람의 얼굴이다.
딸의 이름을 다루는 연기는 더욱 섬세하다. 소란은 경찰의 의심을 피하려 가경을 서희라고 부른다. 작전을 위한 거짓말에 가장 아픈 진실을 내어준 셈이다. 매년 딸의 생일에 미역국을 끓여 왔다는 이야기를 담담히 전하는 얼굴에도 그 시간이 배어 있다. 딸의 죽음은 과거의 사건이지만 딸을 잃은 어머니의 시간은 끝나지 않았다.
가경과의 관계도 복잡하다. 소란은 그의 재주를 알아보고 위험한 밀정 임무로 끌어들인 사람이다. 그러면서 가경에게 총을 겨누는 필립을 향해 자신도 총을 든다. 임무에 필요한 사람을 붙잡으려는 절박함과 다친 젊은이를 지키려는 마음이 겹친다. 김현주는 이 둘을 성급하게 하나로 정리하지 않는다.
"도와줘. 우리는, 나는 네가 필요해"라는 부탁은 그 경계를 드러낸다. 조직을 대신하던 말이 개인의 호소로 바뀐다. 가경의 등에 약을 발라주는 얼굴이 오래 남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상대를 위험에 보낸 사람의 책임과 죽은 딸의 이름을 건넨 사람의 애틋함이 함께 읽힌다. 어머니처럼 다정하게만 연기했다면 놓쳤을 복잡함이다.
김유정이 가경의 생존 본능과 능청으로 극에 활기를 준다면 김현주는 그 발걸음이 향하는 시대의 무게를 붙든다. 경쾌하게 움직이는 가경 곁에 소란의 오래된 상처가 놓이면서 첩보의 흥분 뒤에 남은 사람들의 고통이 보인다. 김현주는 이야기를 무겁게 누르지 않으면서도 그 무게를 잊지 못하게 하는 중심이다.
하이틴 스타로 주목받던 김현주는 어느덧 데뷔 30년 차의 베테랑 배우가 됐다. 그동안 '유리구두'와 '토지', '애인 있어요', '트롤리' 등에서 꾸준히 주연을 맡으며 긴 호흡의 서사를 책임져왔다. 인물의 복잡한 사정과 감정을 끝까지 설득력 있게 끌고 가는 힘도 그 시간 속에서 깊어졌다.
'지옥' 시리즈와 '선산', '정이', '실낙원' 등 여러 작품을 함께하며 얻은 '연상호의 뮤즈'라는 수식은 그렇게 쌓인 신뢰를 보여준다. 연상호는 영화 '실낙원' 인터뷰에서 "김현주만큼의 에너지와 디테일을 다 가진 배우가 떠오르지 않더라"라고 말했다. 거듭 함께하는 데에는 감독의 상상을 구체적인 캐릭터로 완성해 내는 배우의 역량이 있다. 김현주는 자신이 쌓아온 시간을 인물이 살아온 세월로 바꾸며, 믿고 보는 배우로서의 입지를 더욱 단단히 굳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