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역 비하 응원으로 인한 배재고등학교 야구부 중징계를 두고 “5·18이 성역이 됐다”고 주장한 이병태 대통령 직속 규제합리화위원회 부위원장에 대한 여권 내 사퇴 요구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이 부위원장이 “표현의 자유가 책임이 따르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라며 해명에 나섰다.
이 부위원장은 5일 밤 자신의 페이스북에 “성찰의 책임은 사회적 규탄의 영역이지, 법적 징계의 영역이 아니라는 말”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불쾌한 언어에 대응하는 올바른 방법은 규제와 징계라는 법적 칼날이 아니다”며 “살아가면서 타인에 대한 배려도 배워야하지만 타인의 말에 상처받지 않는 심지도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총리급인 이 부위원장은 지난 2일 페이스북에서 5·18민주화운동을 조롱하는 ‘스타벅스 응원가’로 징계를 받은 배재고 야구부와 관련해 “이 땅에 5·18이 성역이 된 것”, “북한의 모습”이라고 썼다. 이후 해당 글에 대한 비판이 이어지자 이 부위원장은 지난 4일 페이스북에 “내 의견의 핵심은 ‘표현의 자유’다”라며 징계가 부당하다는 주장을 반복했다.
아래는 이 부위원장의 글 전문.
[표현의 자유에 대한 위험한 주장들] 표현의 자유 옹호가 5.18 모욕으로 둔갑하는 상황이 절망적이라서 더 이상 언급을 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일각의 양비론적 표현의 자유 제약 가능성의 주장들이 퍼지고 있어서 내가 이해하는 표현의 자유에 대해 다시 밝힌다.
평소 나는 페친 오진영 작가님의 맛깔나는 글을 즐겨 읽는다.
하지만 내가 촉발한 표현의 자유에 대한 아래 반론은 표현의 자유를 사실상 인정하지 않는 주장이다.
이글은 존 스튜어트 밀의 ‘해악의 원칙(Harm Principle)’을 근거로 삼아, 보편적 사상 표출과 특정 대상을 향한 집단적 모욕·조롱을 날카롭게 분리해 낸 글이다.
하지만 자유주의 철학의 본질과 법철학적 관점, 그리고 미국을 비롯한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판례 기준을 바탕으로 이 글의 핵심 전제가 왜 표현의 자유를 부정하는 지 살펴본다.
1. 표현의 자유를 재단하는 이분법의 함정
밀의 해악과 미국의 판례가 말하는 진실은 무엇인가?
원문은 광화문에서의 “김일성 만세”와 야구장에서의 집단적 조롱 구호를 ‘자기 관련 행위’와 ‘타인 관련 행위’라는 이분법으로 명쾌하게 나누어 후자에 대한 규제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이 논리는 존 스튜어트 밀의 사상을 자의적으로 해석했을 뿐만 아니라, 표현의 자유가 가진 본질적 속성과 현대 민주주의 법철학의 발전 과정을 간과한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
(1). 존 스튜어트 밀은 ‘기분 나쁠 자유’나 ‘언어적 공격’의 처벌을 말하지 않았다.
원문은 밀의 명저 <자유론>을 인용하며, 타인에게 해악을 끼치는 언어적 공격은 규제 대상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밀이 말한 ‘해악(Harm)’은 타인의 주관적 감정이 상하거나, 모욕감을 느끼거나, 정신적 상처를 입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밀이 정의한 해악은 타인의 법적 권리를 직접적으로 침해하거나 실질적인 물리적 손해를 입히는 행위에 국한된다.
만약 누군가를 불쾌하게 만들고 상처를 주는 표현을 모두 ‘해악’으로 규정해 처벌한다면, 세상의 모든 논쟁적 표현은 금지될 것이다. 밀은 오히려 다수가 극도로 혐오하고 모욕적이라고 느끼는 의견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물리적 폭력을 선동하지 않는 한 철저히 보장되어야 진리의 자정 능력이 발휘된다고 보았다.
오 작가의 표현을 빌려말하면 밀이 무덤에서 일어난다면, 자신의 철학이 ‘불쾌감을 주는 언어 규제’의 명분으로 쓰이는 것에 가장 먼저 분노했을 것이다.
말을 할 때 우리는 상대의 기분을 정확히 예상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것을 전제로 말을 하지 말라면 할말이 별로 없다. "밥 먹었니"라는 말에도 어떤 사람은 내가 밥도 못 먹고 다닐 무능한 사람으로 보면서 모욕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기분(감정)은 객관적이지 않은 내면의 심리다.
(2) 대상을 지목했는가에 따른 이분법은 성립할 수 없다
오 작가님은 특정 대상을 향한 공격에는 명백한 피해자가 존재하므로 표현의 자유로 보호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말은 직접 거론하든 안 하든 맥락 속에서 반드시 상대를 갖기 마련이다. 대상을 명시했는지 여부로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기 시작하면 사상의 자유 시장은 완전히 붕괴한다.
오 작가가 용인한 광화문의 “김일성 만세”를 생각해보자. 이 구호는 특정인을 지목하지 않았으니 무해한가? 전혀 그렇지 않다. 6·25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수많은 실향민과 유가족, 그리고 북한 정권에 의해 인권을 유린당한 피해자들에게 “김일성 만세”라는 외침은 그 어떤 조롱보다 피눈물이 나는 언어적 폭력이자 삶의 존엄을 짓밟는 행위다.
그들 역시 “나를 향한 직접적인 언어 폭력”이라며 처벌을 요구할 수 있다. 이처럼 주관적인 상처와 대상을 기준으로 표현의 자유를 재단하면, 결국 그 누구도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소수의견을 낼 수 없게 된다.
(3) 현대 민주주의가 ‘표현’이 아닌 '행위'를 처벌 기준으로 삼는 이유
미국을 비롯한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이 혐오감이나 모욕감을 주는 표현을 법으로 성급히 처벌하지 않는 이유는 명확하다.
말을 처벌하기 시작하면 공권력이 무엇이 ‘정당한 말’이고 무엇이 ‘처벌받을 말’인지 결정하는 독재적 심판관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 법학은 오직 ‘표현’이 아닌 구체적인 ‘행위’와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발생할 때만 법적 제재를 가한다.
미국 대법원의 기념비적인 판결들이 이를 증명한다.
브란덴부르크 대 오하이오 사건 (1969년): 백인 우월주의 집단인 KKK가 흑인과 유대인을 향해 극단적인 혐오 발언을 쏟아냈음에도, 대법원은 이것이 “임박한 불법 행위를 선동하거나 발생시킬 가능성이 없는 한” 처벌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이게 상대가 있는 혐오적 발언도 행동이나 행위가 아니면 처벌하지 않는 원칙의 기념비적 판결이다.
내셔널 소셜리스트당 대 스코키 사건 (1977년): 유대인 학살(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집단 거주하는 마을에서 네오나치 공산주의자들이 나치 문양을 들고 행진하려 했을 때도, 미국 법원은 그 표현이 아무리 기괴하고 유족들에게 끔찍한 고통을 줄지라도 행진 자체를 금지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 판결들은 미국 사회가 네오나치나 KKK의 사상에 동조해서가 아니다. 아무리 불쾌하고 사악한 언어일지라도, 그것이 '물리적 폭력'이라는 구체적 행위로 이어지지 않는 한, 국가가 표현을 통제하는 것이 민주주의 체제에 더 큰 해악을 끼친다는 점을 알기 때문이다.
(4) 표현의 자유가 책임이 따르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성찰의 책임은 사회적 규탄의 영역이지, 법적 징계의 영역이 아니다라는 말이다.
거짓을 반복하면 도덕적 비난과 자신의 명성에 해가 되는 책임이 따른다.
하지만 거짓말을 처벌하면 거짓을 판결하는 권한을 공권력이 갖게되고 그것은 전체주의로 갈 가능성이 생긴다.
위의 내용을 다시 확인하면 거짓으로 남의 재산을 갈취했거나 명예를 훼손해서 물질적 손실을 끼쳤으면 처벌 대상이지 거짓말 자체가 공귄력에 의한 처벌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야구장에서 울려 퍼진 조롱 구호는 (만약 그것이 혐오 발언이었다면) 성숙한 시민사회에서 마땅히 비판받고 도덕적으로 규탄받아야 할 저급한 행위다. 진정한 자유주의자라면 나의 언어가 타인의 존엄을 베지 않도록 성찰해야 한다는 주장 역시 윤리적으로 옳다.
타인에게 불쾌감을 준 조롱을 처벌한다면 “스벅 가자”가 조롱인지, 불쾌감의 정도가 얼마인지 누군가는 선을 그어야 한다. 오 작가님은 조롱과 풍자의 경계를 그을 수 있는가?
주관적 경험을 근거로 처벌하면 억울한 사람들이 양산된다.
그러나 그 '성찰의 책임'을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국가 권력이나 제도적 징계를 통해 말의 입을 막으려는 순간, 자유주의는 종말을 고한다.
불쾌한 언어에 대응하는 올바른 방법은 규제와 징계라는 법적 칼날이 아니다.
공론장 속에서 더 큰 비판과 성숙한 시민들의 사회적 압박을 통해 그 구호를 스스로 부끄럽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밀이 꿈꾸었던 위대한 근대 사회의 자정 능력이다.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 말이다.
사회의 질서를 정립해 가는 방법은 도덕적 자율 규제와 공권력에 의한 타율 규제의 영역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 어떤 것도 완벽하지 않지만 어떤 방법을 선택했을 때 긍정과 부정의 대가를 저울질한다.
인류 역사는 표현의 자유는 최대한 보호하는 것이 사회 발전과 안전에 유리하다는 결론을 낸 것이다. 언어가 타인에게 기분 나쁘고 폭력성이 없어서가 아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타인에 대한 배려도 배워야하지만 타인의 말에 상처받지 않는 심지도 키워야 한다. 의도하지 않았으나 상처 받은 상대가 있으면 사과하고, 실언의 사과를 수용하고 악수하고 헤어지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다.
오 작가의 아래 글은 스튜어드 밀의 철학을 분명하게 오해한 글이다.
나는 이 논란을 계속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지식인들이 표현의 자유에 대해 정확하지 않은 양비론적 입장을 취하는 것에 대해 우려를 전하고자 하는 것이다.
고경주 기자 go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