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애
논설위원

1995년에 대학에 입학한 나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남성’을 통칭 ‘오빠’라고 했다. 1980년대 운동권 문화가 캠퍼스에 남아 있던 그 시절, 고학년 ‘언니’들 일부는 그들을 ‘형’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내 동기들은 그냥 오빠라고 했다. 남녀는 연애를 전제로 한 관계란 인식과 가부장적 위계질서를 타파해야 한다는 데는 절대 동감하면서도, ‘남성이 손위 남성을 부르는 호칭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성평등을 관철하자는 게 모순 아닌가’ 마뜩잖았던 것도 사실이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 만난 연상의 남성들을 오빠라고 불러본 적은 없다. 대부분 그랬다. 대개는 선배, 나이 많은 동기는 ○○○(이름)이었고, 취재원들에게도 ○부장·○차장·○팀장 등의 호칭을 붙였다.
“여기 정우 오빠, 오빠 해봐요.” 부산 북갑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한 하정우 더불어민주당 후보 지원 유세에 나선 정청래 대표의 발언이 민주당 선거 주요 ‘악재’ 중 하나로 지목되고 있다. 여덟살, 초등학교 1학년한테 오십 다 된 아저씨(하 후보는 1977년생이다)를 “오빠”라고 부르라니. 굳이 국립국어원의 유권해석을 받아봐야 아나. ‘40살 정도의 나이 차이는 일반적인 ‘손위 형제’의 범주를 넘어 부모 세대에 가까운 격차다. 따라서 사회적 통념과 언어 예절을 고려하면 ‘오빠’라는 호칭은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는 건 초등생도 그냥 안다.
운동권 대학생(85학번) 시절 여학우들로부터 ‘형’ 소리깨나 들었을 정 대표가 생뚱맞게 왜 그런 호칭을 요청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 한마디를 갖고 “벌건 대낮에 아이를 상대로 행해진 오빠 호칭 강요”(박충권 국민의힘 대변인), “명백한 ‘아동 성희롱’이다. 최소한의 도덕심마저 없는 미친 작태”(박정훈 국민의힘 의원) 운운하며, 아동복지법 위반 혐의로 고발까지 할 일인가. 지원 유세 현장에서 ‘친근한 젊은 정치인’이란 이미지를 강조하려던 걸 갖고, ‘정치적 올바름’을 내세워 과도한 공세를 펴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온라인에선 ‘오빠라고 불러달라’던 직장 내 성폭력 가해자들 사례가 거론되고 ‘지인이 자꾸 내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는 것도 싫다’는 여성들의 불쾌감 토로가 이어지고 있다. 논란이 가라앉지 않는 걸 보면, 오빠란 호칭이 확실히 30여년 전 나의 대학 시절보다 훨씬 더 ‘평범한 호칭’에서 멀어졌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달라진 시대 상황에 맞게 오빠란 호칭은 집 밖으로 나오지 않게 하는 것이 상책이다. 이런 시대 변화를 읽지 못한 건, 정 대표의 실책이다.
하지만 정 대표의 오빠 발언에서 더 큰 문제로 느껴진 건, 하 후보를 ‘얼라’ 취급했다는 점이었다. 시대 변화에 맞춰 세대교체를 하겠다는 의지보다, 필요한 얼라들 몇 앞세워 앞으로도 오래도록 정 대표 세대가 정치를 주도하겠다는 심중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2015년, 33살 이동학 새정치민주연합(민주당의 전신) 혁신위원이 “무기력한 모습으로 전락”한 586 정치인들을 비판하며 세대교체를 요구했을 때, 사석에서 “세대교체가 하라고 해서 그냥 되는 거냐. 앞으로도 몇십년은 우리가 더 하게 될 것”이라고 했던 한 586 의원의 말이 떠올랐다.
실제로도 이 전 혁신위원의 세대교체 요구가 나온 지 1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정치권은 5060이 주도하고 있다. 2024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22대 총선 직후 낸 통계에 따르면, 국회의원 평균 연령은 56살이다. 300명 중 250명(83.3%)이 50·60대였다. 게다가 이번 6·3 지방선거에 등록한 후보 가운데 40살 미만 ‘청년 후보’도 10.4%(전체 7828명 중 818명)에 불과하다. ‘정치적으로 훈련된 젊은 정치인이 없는 걸 어떻게 하겠냐’고 항변할 수도 있겠지만, 이 핑계로 5060 정치 기득권층이 신인 정치인들의 정계 진출 사다리를 걷어차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정 대표 발언 논란 이후, 하 후보는 “나 쉰 뱀띠, 정우쓰인디. 아임 낫 큐트 애니 모어”(I’m not cute any more·‘난 더 이상 귀엽지 않아’란 뜻으로, 걸그룹 아일릿의 노래 가사)를 외치는 영상을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저도 크면 정우 형을 담고 싶어요”라는 초등생의 응원 편지 글에 답하며 “근데 형 아니고 삼촌이란다”라고 덧붙였다. ‘인공지능(AI)으로 세상을 바꿔보겠다’고 정치에 나선 전문가가 ‘나이 어필’에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걸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심경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