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는 한 아이의 아빠이자 13년차 직장인입니다. 지금 다니는 직장을 한번 퇴사했다 돌아온 탕아이기도 합니다. 퇴사 이유는 격무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스태프 부서에서 대표의 의사결정을 지원하는 일을 합니다. 대표가 저녁 7시에 회의를 잡으면 밤늦도록 붙들려 있어야 하고, 아침 8시에 보고를 받겠다고 하면 새벽 2시까지 자료 만들다 퇴근하고 다시 새벽같이 출근해야 합니다. 그래도 참을 만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아이를 보지 못하는 날이 쌓이면서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찾아 이직했습니다.
이직한 곳은 최악이었습니다. 꼰대 문화와 이직자에 대한 배척을 겪어보니 쪽잠 자고 다시 출근하는 삶이 차라리 나았습니다. 모든 게 망쳐졌다는 생각과 불면에 시달릴 때, 복직 제의가 왔습니다. 창피했지만 돌아갔고 육아휴직을 신청할 수 있는 기간인 6개월만 채우고 1년 육아휴직을 썼습니다. 이러면 저를 다른 부서로 보낼 줄 알았습니다. ‘퇴사도 번복했는데 한번 더 철판을 깔자. 그래서 쫓겨나자’는 계산이었습니다. 하지만 육아휴직을 끝내고 1년이 되도록 아직 이 부서에 붙잡혀 있습니다.
제 업무 태도는 불량합니다. 꼬우면 내보내라는 심산으로 일합니다. 아이 하원 때문에 무조건 ‘칼퇴’하는 요일을 정해놨고, 갑자기 일을 던져주면 성질도 부립니다. 그래도 팀장은 제 눈치를 봅니다. 이렇게 일해도 다른 사람들보다 하는 일이 많고, 제 역할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퇴사 번복에 육아휴직까지 쓰고, 온갖 방법으로 팀 분위기를 흐리고 있는데 뭘 어떻게 더 해야 쫓겨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이대로 여기 있는 게 낫겠다 싶기도 합니다. 부서원들 모두 제가 칼퇴해야 하는 요일을 알고 있고 아무도 터치하지 못합니다. 짜증을 부려도 뭐라 못 하고 제가 관둘까 봐 걱정합니다. 제가 없을 때 더 고생했으니까요. 다른 부서에서 누구도 저에게 뭐라 할 수 없을 때까지 성과를 내려면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여기서 제 입지를 누리는 게 아이와의 시간을 그나마 보장받는 길인 것 같기도 합니다. 조영훈(가명·39)
친구들과 지리산 종주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제 배낭은 일관되게 무거웠는데 친구들 몸놀림은 점점 가벼워졌습니다. 알고 보니 코펠과 버너가 들어 있던 제 배낭은 짐이 거의 줄지 않았지만, 식재료가 들어 있던 친구들의 배낭은 점점 비워지고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안 친구가 제 짐을 들어주려 했는데 왠지 소중한 걸 뺏기는 기분이었습니다. 짐짝에 불과한 코펠과 버너를 뺏기는 기분이라니. 돌아보면 참 이상한데 ‘제일 무거운 짐을 끝까지 혼자 지고 지리산을 종주했다’는 저만의 서사를 완성하고 싶었습니다.
고통만 있다면 사람들은 그 자리에 오래 머물지 않습니다. 고통과 함께 어떤 보상이 주어질 때 고통스러운 자리를 떠나지 못합니다. 그 보상은 은밀하고 남들이 보기에 하찮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개인에게는 아주 강력합니다. ‘제일 무거운 짐 지고 지리산 종주해서 어디에 쓰려고?’, ‘누가 짐 들어주면 고맙고 편하지 않나?’ 하는 상식적인 의문을 다 물리칠 만큼이요.
영훈님도 마찬가지로 지금 부서가 고통도 주지만 그와 함께 보상도 주는 것 같습니다. 모두 야근을 하지만 영훈님에게는 ‘칼퇴’가 허용되고, 성질을 부려도 참고 맞춰주는 예외적 입지가 그 보상입니다. 직원들을 쪽잠 재워가며 일 시키는 매정한 회사지만, 영훈님만은 함부로 다룰 수 없습니다. 다른 부서로 가는 건 이런 예외적 입지를 포기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길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에이스 대우, 그게 뭐라고. 월급 똑같이 받는데 편한 게 낫지’ 하는 의문이 들지 모르겠습니다. 남들 눈에도, 영훈님 자신도 이토록 괴로워하면서 이 부서가 낫다고 하는 모순이 잘 납득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금 영훈님을 움직이는 것이 단순한 인정 욕구를 넘어선다는 뜻일 겁니다.
이직하기 전 영훈님은 대표를 위해 대기하다 불려 다니고 마음대로 쓰이는 존재였습니다. 저녁 약속이나 여가 같은 소소한 계획이 언제든 틀어질 수 있다는 불확실성은 내 삶에 대한 주도권이 나에게 없다는 무력감을 줍니다. 그래서 이직을 시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다시 무력한 자리로 돌아오며 창피함뿐만 아니라 패배감, 부채감도 컸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부서에 있으면 나만 빚진 사람으로 있지 않아도 됩니다. 퇴사한 직원을 다시 불러들일 만큼 내 빈자리를 크게 느끼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나도 회사에 빚지고 있지만 회사도 나에게 빚지고 있다는 감각은 무력감과 수치심, 패배감과 부채감을 모두 반전시킵니다. 나만 회사를 원했던 게 아니라 회사도 나를 필요로 한다, 회사만 나를 괴롭게 하는 게 아니라 나도 이 조직을 곤란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걸 확인했으니, 회사와 영훈님의 관계도 더는 일방적이지만은 않습니다.
그래서 영훈님 몫을 더 편히 요구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퇴근하는 것은 당연한 영훈님의 몫입니다. 내 몫일지라도 그걸 챙기는 것은 염치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영훈님 안에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성과를 내야 누구도 뭐라고 하지 못할 거라는 믿음에서 충분히 갈려 나가 빚을 만들어 놔야 편히 내 몫을 가져올 수 있다는 조건부 논리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영훈님에게 빚진 게 없는 새 부서에서는 가져올 것도 없게 느껴질 겁니다.

물론 한국에서 ‘칼퇴’는 아직도 눈치 보이는 일입니다. 야근하는 동료들을 두고 먼저 퇴근하는 상황은 누구라도 편치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뭘 더 해야 쫓겨날까’에서 ‘어떻게 하면 나를 갈아 넣어 빚을 만들지 않아도 내 권리를 요구하고 가져올 때 더 편안하게 느낄 수 있을까’로 질문이 바뀔 때, 영훈님이 더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박아름 심리상담공간 숨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