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의 은행잎이 길 위에 낙엽처럼 쌓였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 ㅎ미술관 옆 좁은 길. 한창 잎을 키워야 할 은행나무 아래 도로는 연둣빛 잎으로 빽빽하게 덮였다. 수관 곳곳은 누렇게 변했고, 잎은 말라붙은 채 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나무 밑동과 뿌리 부근에는 드릴로 뚫은 듯한 둥근 구멍과 플라스틱 주입기 흔적도 남아 있었다.
이 오래된 은행나무에 제초제가 주입된 사실이 확인됐다. 최근까지 건강했던 나무에서 푸른 잎이 대량으로 떨어지고 수관 일부가 누렇게 변하는 등 급격한 이상 증상이 나타나면서, 주민들은 추가 훼손 방지와 나무 보호 조치를 요구하고 있다. 해당 미술관 쪽은 나무 뿌리로 인해 담벼락이 훼손될 우려가 있어 조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나무 밑동 쪽 드릴로 뚫은 둥근 구멍
주민들 설명을 종합하면, 해당 은행나무는 이 미술관 외벽 인근 공동사유지에 있는 나무다. ㅎ미술관 소유는 아니며, 여러 명이 공동소유한 도로에 자리하고 있다. 주민 홍아무개씨는 “보호수로 지정돼 있지는 않지만, 이 나무는 100년가량 이 동네 골목을 지켜온 오래된 은행나무”라고 말했다.
주민들이 이상 징후를 처음 본 것은 몇 주 전이다. 홍씨는 “몇 주 전부터 뿌리 부근 앞뒤로 나무에 구멍을 내고 플라스틱 주사기처럼 보이는 것이 꽂혀 있었다”며 “처음에는 누군가 나무에 영양제를 투여하나 보다 생각하고 주의 깊게 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후 나무가 푸른 잎을 대량으로 떨어뜨리고 일부 잎이 누렇게 마르기 시작하면서, 주민들은 제초제 주입 등 고의 훼손 가능성을 의심하게 됐다.
주민들이 보내온 현장 사진을 보면, 은행나무 아래 도로는 떨어진 잎으로 뒤덮여 있다. 한창 잎이 무성해야 할 5월 하순인데도 수관 곳곳의 잎은 누렇게 변하거나 말라붙은 모습이다. 나무 밑동과 뿌리 쪽에는 드릴로 뚫은 것으로 보이는 둥근 구멍과 플라스틱 주입기 흔적도 확인된다. 주민들은 나무에 꽂혀 있던 플라스틱 주입기 여러 개를 증거 보전을 위해 보관하고 있다고 밝혔다.
CCTV를 통해 드러난 진실
한겨레가 확인한 폐회로텔레비전(CCTV) 영상에는 5월22일 조경업체 직원으로 추정되는 2명이 나무 앞에 쪼그려 앉아 드릴로 구멍을 뚫고 약제를 주입하는 모습이 담겼다. 작업이 끝난 뒤 또 다른 남성이 나무 뿌리 주변을 살피는 장면도 촬영됐다.
주민들은 이후 경찰과 함께 관계자를 만나 지난달 나무 뿌리 인근에 여러 개의 구멍을 뚫고 제초제를 주입한 사실을 인정받았다. 대학교수인 주민 정현경씨는 “나무 밑에 드릴로 열몇 개 구멍을 뚫고 플라스틱 주입기를 넣은 흔적이 있다”며 “CCTV에도 관련 장면이 찍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 땅은 ㅎ미술관 소유가 아닌데, 소유주 허락 없이 나무에 구멍을 뚫고 약제를 넣은 것”이라며 보호수 지정과 형사고발, 나무 치료 비용 부담 등을 요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나무를 둘러싼 갈등은 오래전부터 이어져왔다. ㅎ미술관 쪽은 수년 전부터 나무 뿌리가 담벼락 밑으로 파고들어 담벼락에 금이 가는 등 위험한 상황이라고 판단했다. 이후 나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청 및 토지 소유주들과 접촉했고, 내용증명을 보내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주민들은 종로구청 녹지과가 지난해 말 해당 은행나무의 안전진단을 한 결과 위험성이 인정되지 않아 나무 제거는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말한다.
이 과정에서 사유지 나무를 둘러싼 행정 대응의 한계도 드러났다. 홍씨는 나무를 살릴 방법을 찾기 위해 종로구청 녹지과와 주민센터, 경찰 등에 문의했지만 즉각적인 보호 조치로 이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구청 녹지과에서는 “사유지 나무라 관여하기 어렵다”는 취지의 답변을 들었고, 주민센터에서는 소유주 정보가 개인정보라는 이유로 확인할 수 없었다고 한다. 경찰 신고 과정에서도 국민신문고를 통한 접수를 안내받았지만, 사건 처리에 시간이 걸릴 수 있다는 답을 들었다고 했다. 보호수나 가로수로 지정되지 않은 사유지 나무가 훼손 위기에 놓였을 때 행정이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지도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주민들 기뻐하며 사진찍던 고목나무인데…
주민들은 5월23일 오후 5시 ㅎ미술관 옆길 은행나무 앞에서 현장 행동을 할 예정이다. 참가자들은 작은 천 조각을 가져와 함께 이어 붙인 뒤 나무 둘레에 묶으며, 나무를 지키겠다는 뜻을 남기겠다고 한다. 현장에서는 은행나무를 살리기 위한 의식도 열릴 예정이라고 주민들은 전했다.
홍씨는 “이 나무는 이름은 없지만 이 마을의 보호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무 안에는 새들과 여러 생명이 기거하고, 사람들도 이 마을에 왔다가 은행나무 앞에서 기쁨을 느끼고 사진을 찍는다”고 말했다.
한편 주민들은 서울환경연합이 소개한 나무의사에게 은행나무 상태와 향후 조치에 대해 자문을 구했다고 밝혔다. 주민들이 전한 전문가 의견을 종합하면, 해당 은행나무는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은 상태로 보이며 상태가 빠르게 악화되고 있다. 제초제 피해가 실제로 있었다면 회복은 매우 어려울 수 있고, 이미 고사 단계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도 나왔다. 다만 생명체인 만큼 단정은 어렵고, 당분간 경과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현재 가능한 조처는 제한적이며, 가장 교과서적인 방법은 나무 주변 아스팔트를 일부 제거하고 토양을 부드럽게 해 뿌리가 숨 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물을 매일 주는 것은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고, 과습 때는 뿌리 손상 위험도 있어 매우 덥고 건조한 시기에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충분히 물을 주는 방식이 가능하다는 조언도 있었다. 전문가는 인위적 훼손 정황이 있는 만큼 조사와 책임 규명, 처벌 요구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전했다고 주민들은 밝혔다.
김양진 기자 ky029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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