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 감성으로 재탄생한 체호프 역작…국립극단 '반야 아재'

1930년대 말 일제강점기 배경…혼란의 시대, 흔들리는 존재 은유

심은경·조성하 깊은 울림 연기…오는 31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첫 공연을 마친 뒤 관객에게 인사하는 '반야 아재' 출연진들
(서울=연합뉴스) 연극 '반야 아재' 출연진들이 22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첫 공연을 마친 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2026.05.22 hyun@yna.co.kr

(서울=연합뉴스) 임순현 기자 = "도망가지 말고, 살아가요. 그러다 쉬는 날이 오겠죠." 조카의 담담한 위로에 50대 삼촌은 온몸을 진동하듯 떨며 복받친 울음을 토해낸다.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거장 안톤 체호프의 대표 희곡 '바냐 아저씨'가 국립극단의 손길을 거쳐 '반야 아재'라는 이름으로 지난 22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무대에 올랐다. 조광화 연출이 한국적 정서와 시대적 배경을 입혀 새롭게 탄생시킨 이 작품은 원작의 비극적 아이러니와 인간의 복합성을 우리 사회의 현실과 맞닿게 풀어내며 관객의 깊은 공감을 끌어냈다.

이번 '반야 아재'는 원작을 완벽하게 한국적 설정으로 번안해냈다는 점에서 긍정적 평가를 받는다.

조광화 연출은 작품의 시대적 배경을 1930년대 말 일제강점기로 옮기고, 정미소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가족과 인간의 상실, 무력감, 삶의 아이러니를 한국적 정서로 풀어냈다. 무대와 의상, 음악 등도 한국적 색채와 현대적 감각이 조화를 이루며 대극장인 해오름극장의 공간감을 적극 활용해 인물의 내면과 시대의 혼란을 시각적으로 드러냈다. 배우들은 큰 공간이 주는 여백과 공간감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근대와 현대가 혼재된 의상과 건축 양식 등의 무대 장치는 인물들이 겪는 혼란성을 시각적으로 은유했다.

[국립극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이런 번안은 원작의 보편적 주제를 한국 사회의 현실과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데 성공했다. 평범한 인물들의 일상과 상실, 그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삶의 의미를 깊이 있게 조명하며, 관객들은 무대 위 인물들의 이야기를 곧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게 된다. 장엄하고 비장한 서사보다는 일상의 허술함에 애틋한 시선을 주고, 시대와 스스로에 대한 염증을 치유하는 극이 될 예정이라는 연출의 의도처럼, '반야 아재'는 현대의 관객들에게 잔잔한 위로와 공감을 충분히 전했다.

이처럼 꼼꼼하게 번안한 덕분에 '반야 아재'는 지난 7일 LG아트센터 서울에서 개막한 이서진, 고아성 주연의 '바냐 삼촌'과는 확연하게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최대한 원작의 설정에 맞춘 '바냐 삼촌'은 상대적으로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극이 이어지지만, '바냐 아재'는 희극적 요소가 강해진 느낌이다. 특히 한국적 정서와 맞닿은 대사들이 객석의 긴장감을 완화해주면서도 동시에 몰입감을 높여준다. 이 때문에 두 작품을 비교해 보는 재미가 쏠쏠할 듯하다.

심은경과 조성하
[국립극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이번 공연의 또 다른 볼거리는 단연 심은경과 조성하가 무대 위에서 뿜어낸 연기 아우라였다. 스크린과 브라운관에서 이미 입지를 다진 두 배우는, 연극 무대에서도 각자의 캐릭터를 섬세하게 구현하며 극의 중심을 단단히 잡았다.

심은경은 박이보(원작의 바냐)의 조카 서은희(원작의 소냐)로 분해, 실패한 짝사랑과 외모 콤플렉스를 안고 살아가지만, 현실을 묵묵히 견디는 인물의 내면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그는 "운명처럼 다가온 작품"이라는 공연 개막 전 소감처럼 실제 무대 위에서 심은경은 서은희의 순수함과 단단함, 그리고 삶에 대한 겸허한 진실을 담담하게 표현했다. 대사 한 마디, 눈빛 하나에도 인물의 복합적인 감정이 오롯이 담겨, 관객들은 그녀의 연기를 통해 서은희라는 인물에게 깊이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 특히 마지막 독백 장면에서는 절제된 감정과 담담한 어조로, 고단한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서은희의 모습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며 깊은 여운을 남겼다.

조성하는 박이보 역을 맡아, 성실하고 우직하지만, 현실의 격정과 인생의 굴곡을 품은 인물을 진정성 있게 표현했다. 무대 위 조성하는 박이보의 무력감과 분노, 그리고 회한을 절제된 몸짓과 표정으로 드러내며, 인물의 내면적 갈등을 깊이 있게 전달했다. 특히 자형인 서병후와의 갈등 장면에서는 폭발적인 감정 연기로 극의 긴장감을 극대화했고, 소동이 끝난 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장면에서는 삶의 냉혹한 진실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인간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냈다.

'반야 아재' 출연진
[국립극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베테랑 배우들의 앙상블 역시 극의 완성도를 높였다. 손숙, 남명렬, 기주봉, 정경순, 임강희, 김승대 등 한국 연극계를 대표하는 중견·원로 배우들이 각 인물의 복합적인 감정과 서사를 치밀하게 구축하며 140분의 공연 시간 내내 관객의 몰입을 이끌었다.

여름비가 내리는 모습을 실감 나게 구현하고, 실제 정미소를 가져다 놓은 듯한 무대장치와 막 사이에 일제강점기에 유행했던 만요를 집어넣은 음악도 작품의 매력을 한층 더 끌어올린다. 공연은 오는 31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이어진다.

hyu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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