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대학로 떠나 자연으로 간 연극인들…작품 30여개, 800회 무대 올려
주민도 배우가 되는 극장, "'말괄량이 삐삐마을'처럼 명소 만드는 게 꿈"
[※ 편집자 주 = 저출산·고령화와 청년 유출로 지역 소멸 위기가 커지는 가운데 연합뉴스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각 지역의 숨은 자랑거리와 이야깃거리를 재발견하는 기획을 시작합니다. 문화·경제·사회 전반에서 인물, 음식, 문화재, 특산물, 관광지 등은 물론 차별화된 경쟁력을 지닌 다양한 아이템을 발굴해 매주 토요일 송고할 예정입니다. 이를 통해 지역의 자부심 제고, 관광 활성화, 새로운 성장동력 발굴 등을 추진함으로써 지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촬영 천경환 기자
(단양=연합뉴스) 천경환 기자 = 충북 단양 읍내에서도 차로 20여분.
구불구불한 산길을 지나야 닿는 영춘면 별방마을은 전국에서 인구 소멸 위기 지역으로 꼽히는 단양군에서도 외딴곳이다.
지난 21일 마을 한복판에 자리한 붉은 폐우체국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젊게는 60세부터 많게는 85세에 이르는 주민 6명이 연극 대사를 주고받고 있었다.
벽에 칠한 페인트는 벗겨지고 천장에선 빗물이 새는 열악한 공간이었지만, 주민들은 단양군 주최 사투리 경연대회에서 선보일 연극 무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10분짜리 연극 대본을 통째로 외운 이들은 한 시간 내내 지친 기색 없이 연기를 이어갔다.
이곳은 만종리대학로극장이다.
10년 넘게 자연을 무대로 작품 30여개, 800여회의 공연을 올린 예술 공간이자 마을 주민들의 사랑방이다.

촬영 천경환 기자
◇ 농사짓고 호떡 팔아 올리는 연극 무대
만종리대학로극장은 서울 대학로에서 활동하던 허성수 감독과 연극인들이 의기투합해 2015년 허 감독 고향으로 귀촌하면서 탄생했다.
극단 이름은 별방마을 옆 동네인 허 감독의 고향 만종리에서 따왔다.
대학로 임대료 상승으로 연극을 이어가기 어렵기도 했지만, 고향에 돌아와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문턱 낮은 극장을 만들고 싶다는 어릴 적 결심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애초 15명이 함께 귀촌했지만, 지금은 허 감독을 포함해 단원 4명만 남아 있다.
빈자리는 별방마을과 인근 마을의 주민들이 채운다.
덩실덩실 춤을 추던 주민 배우 성수빈(61) 씨는 "농사짓느라 바쁘고 힘들지만 시간을 쪼개 연극 연습하는 게 즐겁다"며 "무대에 설 때마다 떨리지만 잘하고 싶은 욕심이 더 크다"고 말했다.
한때 주말마다 공연을 했지만 코로나19 이후 위축돼 지금은 매년 여름 열흘간의 정기 공연과 마을·축제 순회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무대는 연간 임대료가 50만원인 폐우체국과 주변의 산과 들이다.
허 감독은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밤 풀벌레 소리가 음향이 되고 대자연이 무대가 되는 자연과 맞닿은 연극을 하고 싶었다"며 "문화적 즐길 거리가 부족한 시골 마을에 예술 무대를 선보이고 주민들이 직접 무대에 서서 희열과 벅참을 함께 느낄 수 있어 소중하다"고 말했다.
허 감독과 단원들은 극장 옆 인가에 거주하며 여름에는 감자와 콩을 심고, 겨울에는 호떡을 팔아 공연 비용을 마련한다.
농사일을 병행하느라 손은 거칠어지고 얼굴에는 주름이 늘었지만 그만큼 연극의 깊이가 달라졌다고 한다.
허 감독은 "생산해 본 자만이 소비를 안다고 하듯, 땀 흘려 일해보니 무대에 진심이 담기고 콘텐츠도 깊어진다"며 "농사도, 장사도 넉넉하게 벌지는 못하지만 얻는 게 더 많다"고 웃어 보였다.
극단이 처음 마을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주민들은 '베짱이' 같다는 곱지만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허 감독과 단원들은 뙤약볕 아래에서 농사일을 거들고 온갖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주민들에게 다가갔고, 그 결과 자연스럽게 주민들도 연극에 발을 들이기 시작했다.
이제 극장은 연극만 올리는 곳이 아닌, 주민들이 농사일을 마치고 모여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마을 회의도 여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촬영 천경환 기자
◇ 지역 소멸 방파제 역할도
포기하고 싶은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동고동락하던 단원들이 하나둘 떠나갈 때 홀로 극장을 지키다가 창밖으로 지나가는 트럭 소리만 들어도 당장 서울로 도망가고 싶은 충동이 밀려왔다고 한다.
그러나 낯설기만 했던 동네가 삶의 터전이 되고 주민들과 정이 쌓이면서 버틸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극장은 서서히 입소문을 탔다.
10년 전 하루 20명 안팎이던 관객 수는 이제 매년 여름 공연철이면 하루 100명을 훌쩍 넘긴다.
연극을 보러 단양으로 여름휴가를 오는 단골 관객까지 생겼다.
문화체육관광부 예술경영 대상과 도지사 표창장 수상이라는 성과도 거뒀다.
앞으로의 10년을 준비하는 만종리대학로극장은 이제 새로운 꿈을 꾼다.
주말 공연을 되살리고 스웨덴의 '말괄량이 삐삐마을'처럼 마을 전체를 콘텐츠로 채워 사람들이 찾는 명소로 만드는 것이다.
허 감독은 "10년 전과 비교하면 번듯한 극장이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경제 사정이 나아진 것도 아니지만 아직 하고 싶은 게 많다"며 "요즘은 하드웨어보다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는 소프트웨어형 관광지가 인기인데 우리 극단과 마을이 그런 곳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촬영 천경환 기자
kw@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