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같은 자연’ 뒤에 감춰진 것 [.txt]

자연은 조화롭고 풍요롭다는 환상

인간 바깥의 낙원처럼 자연을 소비

박제된 자연 아닌 생태계의 민낯 봐야

목가적 자연의 이상을 재현한 영국 풍경화식 정원 스타워헤드. 위키미디어 코먼스

배정한의 공간이 전하는 말

“광장에서 숲으로 이어지는 동선이 곡선이 아니라서 자연스럽지 않네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네? 저는 두 공간을 직선으로 연결해야 자연스럽다고 확신합니다.”

“수변을 따라 설계한 식재가 빈약해서 건강하고 풍성한 자연을 느끼기에 부족해요.”

“아뇨, 어린나무들이 자라며 자리 잡아야 자연입니다.”

어느 공원 설계 공모전 심사장에서 벌어진 심사위원과 조경가의 토론 한 대목이다. 결국 그 제출작은 탈락했다. 자연스럽지 않다는 이유로. 이들이 말하는 자연은 무엇일까. 자연스럽다는 건 무슨 뜻인가.

자연은 정말 다양한 경우에 가치 판단의 준거로 동원된다. 시장에서 채소를 고를 때도, 횟집에서 메뉴를 결정할 때도 자연산에 끌린다. 표정도, 옷차림도, 인간관계도 자연스러운 게 미덕이다. 글을 쓸 때도, 발표할 때도, 소개팅 나갈 때도, 야구공을 던지거나 골프 스윙을 할 때도, 심지어 성형 수술마저도 ‘자연스럽게’가 최고다. 이 자연들은 무엇인가. 쉽게 설명되진 않지만, ‘자연스러운 게 좋다’는 뿌리 깊은 믿음이 있다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픽처레스크(그림 같은) 미학과 편집된 자연의 전통은 현대 도시 공원으로 이어졌다.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 전경. 센트럴파크 관리단 제공

이러한 통념은 사회적인 동시에 규범적이다. 생물인류학자 이수지는 ‘자연스럽다는 말’(사이언스북스, 2025)에서 우리가 정답처럼 꺼내 드는 ‘자연’과 ‘자연스러움’이 실은 인간 중심적이고 권위적인 가림막으로 작동한다는 점을 짚는다. 우리는 논쟁적인 사안 앞에서 ‘원래 자연의 섭리가 그렇다’거나 ‘그건 본능적으로 자연스러운 일이다’라며 대화를 종결짓곤 한다. 진화인류학의 통찰에 따르면, 자연에는 고정된 정답도, 도덕적 판단도 없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이 존재할 뿐이다. 자연스럽다는 말은 어떤 상태에 대한 묘사라기보다는 특정한 상태를 요구하는 명령에 가깝다. 우리는 각자의 편의에 맞게 편집된 상태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연의 이름을 빌려온다. “자연스럽다고 할 때 전달되는 긍정적 가치와 달리, 자연은 순수하지도, 편하지도, 또 쉽지도 않”다.

‘자연스러운 게 좋다’는 믿음 속의 자연은 홍수가 휩쓸고 간 들판의 진창이나 모기가 들끓는 습지가 아니다. 우리가 동경하는 자연스러운 자연은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순수한 이상향, 조화와 질서와 풍요가 가득한 낭만의 낙원이다. 생태철학자 티머시 모턴은 이러한 자연관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그는 ‘자연 없는 생태학’(Ecology without Nature, 미번역)에서 진정한 생태적 사유를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자연’이라는 개념 자체를 버리는 것이라는 급진적 주장을 펼친다. 무언가를 자연이라고 명명하는 순간, 그것은 인간의 영역 바깥에 있는 특별한 것, 저 멀리 어딘가에 있는 순수한 것으로 대상화된다.

언뜻 형용모순처럼 들리는 이 주장은 환경을 대하는 관례적 태도의 결함을 드러내준다. 우리는 설악산국립공원은 자연이고 강남역사거리는 인간의 영역이라고 이분한다. 생태적 실재를 둘로 가르는 선은 외면과 회피를 낳는다. 국립공원을 보호받아야 마땅한 신성한 자연으로 특정할수록, 매일 살아가는 도시 공간의 오염과 파괴에 대해서는 둔감해진다. 급조한 정원박람회의 화려한 정원들을 보며 자연의 위로를 구하지만, 전시 정원에 박제된 자연은 일상의 삶과 환경 사이의 생태적 연결고리를 가리는 심리적 방어막일 뿐이다.

인간-자연 이분법의 구도 안에서는 아무리 자연을 찬미하더라도 인간이 중심에 자리하고 자연은 관찰과 감상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분리는 ‘그림 같은 자연이 아름다운 자연’이라는 인식을 키워왔다. 대표적인 예가 18세기 영국의 픽처레스크 미학과 풍경화식 정원 양식이다. 목가적 자연의 이상을 담은 풍경화를 모방해 정원을 구성하는 방식은 19세기의 도시 공원들로 이어졌다. 이러한 미학적 전통 위에서 탄생한 현대 조경은 잃어버린 낙원을 도시 안에 재현하려는 욕망을 일말의 의심 없이 실천해왔다. 부드럽게 경사져 흐르는 녹색 초원, 넓은 그늘을 드리우는 풍성한 수목, 그 사이를 굽이쳐 도는 산책로와 거울 같은 호수, 푸른 하늘과 뭉게구름이 조합된 그림 같은 자연. 하지만 그것은 면밀하게 편집된 자연이다. 인간과 비인간 존재들이 복잡하게 얽힌 실제 생태계의 민낯은 아름다운 자연 뒤로 감춰진다.

박제된 자연을 바라보며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넷플릭스의 고화질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며 감동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모턴은 이런 식의 자연 소비는 ‘주변적 시학’(ambient poetics)에 묶인 것이라고 비판한다. 주변적 시학은 독자나 감상자에게 ‘당신은 지금 자연 속에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수사학적 연출이다. 모니터에 띄워놓은 숲, 카페를 채운 플랜테리어, 호텔 창밖의 산 풍경…. 우리는 아름다운 풍경 바깥에 관찰자로 남겨진다.

지구온난화로 북극의 바다 얼음이 줄어들며, 바다 얼음 위에서 바다표범과 같은 먹잇감을 주로 잡아먹으며 살아가는 북극곰의 삶이 위협받고 있다. 타스 연합뉴스

우리는 기후변화로 위기에 처한 북극곰 영상을 보고 안쓰러워하지만, 빙하를 녹이는 내 방의 에어컨과 영상을 전송하는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모는 감각하지 못한다. 조경가가 공들여 디자인한 그림 같은 자연에서 위무를 얻지만, 공사 과정에서 배출되는 탄소와 생태계의 상호연결성은 알아채지 못한다. 모턴은 이제 “어두운 생태”(dark ecology)를 자각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자연이라는 배경화면을 끄고, 내 몸속의 미세먼지와 하수구의 오물, 멸종해가는 생명체와 내가 끔찍할 정도로 끈적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낯설고 불편한 진실을 직면하는 게 생태적 사유의 시작이라는 것이다(‘어두운 생태학’, 갈무리, 2024).

자연을 지키자는 구호보다 더 절실한 건 자연이라는 우상을 깨뜨리는 일이다. 습관적으로 쓰는 ‘자연’과 ‘자연스러움’이라는 말에 어떤 환상과 편견이 담겨 있는지 의심해보는 것. 공원에 날아온 새 한마리의 소리가 평온한 배경음악이 아니라, 나와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며 생존을 위해 애쓰는 외침임을 감각하는 것. 여기서부터 우상 파괴가 시작된다.

배정한 서울대학교 조경학과 교수·‘공원의 위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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