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기업 ‘소소한 소통’ 백정연 대표의 도전
발달장애인 위한 근로계약서·안전문자 제작
쉽게 쓴 정보, 고령층·어린이·외국인도 필요
병원 문진·복지신청·법률용어를 일상 언어로

발달장애인 김아무개씨는 몇해 전 생애 처음으로 근로계약서에 서명했다. ‘일하고 돈을 받는 것에 대해 회사와 직원이 약속하는 문서’라는 제목의 서류에, 일하는 기간과 장소, 일하는 내용, 일하는 날과 시간, 일해서 받는 돈, 사용할 수 있는 휴가 같은 항목들이 쉬운 말과 직관적인 그림으로 표시돼 있었다.
김씨는 벅차오르는 기쁨으로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다. “누나, 나 오늘 첫 출근 했어. 계약서를 썼는데 다른 사람한테 안 물어보고 나 혼자 읽고 이해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어.”
메시지를 받은 사람은 그가 평소 따르던 사회적기업 ‘소소한 소통’(이하 소소)의 백정연 대표였다. 소소가 ‘쉬운 정보’ 보급 차원에서 발달장애인을 위한 근로계약서를 만들어 배포했는데, 마침 김씨가 취업한 업체에서도 발달장애인을 대상으로 그 양식의 근로계약서를 사용하고 있었다.

지난 13일 오전 서울 금천구 디지털국가산업단지에 있는 소소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만난 백 대표는 “그런 피드백이 너무 감동적이고 보람을 느낀다”며 직원들과도 공유한다고 말했다. “발달장애인들이 스스로를 ‘느린 사람’, ‘물어봐야 하는 사람’,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무언가를 혼자 해냈을 때 느끼는 성취감과 자신감, 새로운 것을 알고 싶고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그들의 삶의 태도와 가치관까지 변화시킬 수 있거든요.”
백 대표는 대학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했고, 15년 넘게 장애인 권리 향상에 힘써온 사회복지사다. 서울 성공회대에서 사회복지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학위 논문도 준비 중이다. 그는 최근 ‘쉬운 정보’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발달장애인이 공공 정보나 복지 서비스 정보, 일상생활에 필요한 정보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 제공하는 일의 필요성과 의미, 다양한 사례와 노하우, 소소한 소통의 창업 이후 지금까지 과정 등을 담았다.
쉬운 정보의 혜택은 발달장애인에게 머무르지 않는다. 디지털 정보기술의 발달 속도를 따라가기 힘든 고령층, 문해력이 부족한 어린이, 어려운 법률·행정 용어에 난감한 일반인, 우리말이 서툰 외국인 노동자 등 누구라도 ‘쉬운 정보’가 필요할 수 있다. 발달장애인은 물론 어린이들도 ‘미션→해야 할 일’ ‘피드백→의견 주기’ ‘익일→다음날’ ‘대관/대여→빌리기’로 바꿔 표현하면 그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쉬운 정보’는 단순히 어려운 말을 쉬운 말로 바꾸거나 한자어와 외래어를 우리말로 바꾸는 작업이 아니다. 백 대표는 쉬운 정보를 “정보 약자의 눈에서 정보를 새롭게 재구성하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그 출발점에는 평소 정보 장벽을 느끼지 않는 이들이 간과하는 질문이 깔렸다. 왜 어떤 사람들은 정보를 이해하지 못하는가? 그는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 정보 제공자가 문제”라고 했다.
2014년 5월 국내 최초로 특정 장애 유형을 위한 법률인 ‘발달장애인 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발달장애인법)이 제정되면서, 백 대표는 이전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길을 걷게 됐다. 그는 당시 보건복지부 산하 공공기관에서 일하고 있었다. 법 시행 준비를 위해 보건복지부에 파견돼 조항 하나하나를 검토하고, 해외 사례를 조사하고, 정책 설계를 준비했다. 그 과정에서 특히 ‘제10조(의사소통지원) ①항’에 주목하게 됐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발달장애인의 권리와 의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법령과 각종 복지 지원 등 중요한 정책 정보를 발달장애인이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작성하여 배포하여야 한다.”
시각장애인에게 점자와 음성 지원, 청각장애인에게 수어 지원이 있듯, 발달장애인에게도 정보 접근 지원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고만 적혀 있을 뿐, 무엇이 쉬운 정보인지에 대한 기준과 지침은 없었다. 당시만 해도 국내에는 ‘쉬운 정보’라는 개념 자체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법 조문조차 발달장애인 당사자들에겐 너무 어려웠어요. 그러면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죠. 아, 이건 단순한 배려가 아니라 권리의 문제구나.”

그는 먼저 법 자체를 쉽게 바꾸기로 했다. 그렇게 나온 것이 2015년 제작된 ‘반갑다, 발달장애인법’이었다. 발달장애인법을 쉬운 언어와 그림으로 풀어 쓴 자료였다. 백 대표는 소속 공공기관에서 장애인 복지 정책의 개발과 시행에 누구보다 적극적이었지만, 소속 기관은 그의 의욕을 따라오지 못했다. 정책보다 기관의 논리가 우선되는 현실에 회의를 느꼈고, 결국 남편의 권유로 퇴사했다.
2017년 그는 함께 일하던 직원 한명과 함께 사회적 기업가 육성 사업을 통해 회사를 창업했다. 그 회사가 ‘소소한 소통’이다. 자본금은 겨우 300만원. 자본주의 시장에서 기업으로 존속할 수 있을지조차 불확실했지만 사명감은 확고했다.
‘쉬운 정보’라는 표현도 백 대표가 직접 고안했다. 영어권에서는 ‘쉽게 읽고 알기’(easy read), ‘이용하기 쉬운 정보’(Accessible Information)라고 부르는데, 국내에서는 단순히 “읽기 쉬운 자료” 정도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쉬운 정보’는 문자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림, 사진, 기호, 표지판, 영상 등 눈으로 보는 모든 형태의 정보를 포함한다. 긴 문장을 잘게 나누고, 핵심 내용을 먼저 배치하고, 필요한 경우 사전 지식을 덧붙여주는 등 정보 약자의 입장에서 정보를 다시 설계하는 작업이다.
그는 공공기관 문서를 “내부 행정 언어”와 “시민을 위한 언어”로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행정과 보고를 위한 전문용어는 내부 문서에 쓰되, 실제 정책과 서비스를 이용하는 시민에게는 완전히 다른 언어로 다시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 차원의 전담 기관이 필요한 이유다.
그의 문제의식은 법률 문서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쉬운 정보에 관심이 큰 몇몇 판사들과 함께 ‘쉬운 판결문’ 강의를 준비하며 실제 판결문을 접했을 때였다. 그는 “나 역시 판결문 앞에서는 완전한 정보 약자였다”고 털어놨다. “한 문장, 한 문단이 너무 길고, ‘죄가 있다고 보지 아니할 수 없다’ 같은 유보적 표현이 많아요. 법률 용어도 일상에서 접하기 어려운 게 대부분입니다.”
그는 쉬운 판결문의 예시로, 몇년 전 한 청각장애인이 지방자치단체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재판부에 ‘판결문을 쉽게 써달라’고 요청했을 때, 판사가 쓴 판결문을 제시했다. 그 판결문에서는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를 ‘안타깝지만 원고가 졌습니다’라고 썼고, 또 판결문에 삽화를 덧붙여 판결의 이유도 쉽게 설명했다.
지난해 2월 사법정책연구원은 ‘장애인 등을 위한 이해하기 쉬운(Easy-Read) 판결서 작성 방안’ 연구보고서를 발간했다. 그 과정에서 백 대표와 발달장애인의 조언이 상당한 도움이 됐다. 앞서 2024년 7월, 소소는 법원행정처의 용역 의뢰로 ‘이지 리드(easy-read) 판결서 작성을 위한 시각자료 개발 연구’를 납품했는데, 이 과정에서 쉬운 판결문 문장들과 함께 시각자료 660종이 만들어졌다.

백 대표는 한국 사회의 정보 체계가 지나치게 공급자 중심이라고 지적한다. 특히 복지 시스템은 더욱 그렇다. 한국 복지제도의 핵심은 여전히 ‘신청주의’다. 자격이 있어도 스스로 찾아 신청하지 않으면 혜택을 받을 수 없다. 문제는 정책을 이해하고 신청하는 과정 자체가 이미 높은 정보 장벽이라는 점이다. 다행히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이런 문제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12일 아동수당과 부모급여 등을 별도 신청 없이 자동 지급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바꾸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백 대표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고 말한다.
“정보 약자에게는 건강, 금융, 복지, 재산권처럼 삶과 직결된 정보가 우선 쉬워져야 해요. 카페나 식당의 복잡한 메뉴판, 병원에서 쓰는 문진표나 의사의 설명, 의약품 복용법, 통신사 대리점에서 휴대폰 개통할 때 쓰는 서류, 금융과 관련된 은행 서식, 현금자동입출금기(ATM)나 키오스크 사용…, 이런 거 다 어려워하세요. 장애인뿐 아니라 많은 비장애인도 마찬가지인데, 그런 게 생각보다 정말 많아요. 모두 쉽게 바꿔야 하는 거죠.”
그가 회사를 세우게 된 계기도 제도와 현실의 간극 때문이었다. 그는 후천적 척수장애를 가진 남편과 결혼한 뒤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장애 감수성’이 실은 업무 안에만 머물러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함께 살아보니까 안 보이던 게 너무 많았어요. 저는 30분이면 가는 길을 남편은 한시간이 걸려요. 위험하고 불편한 경우도 많고요. 같은 세금을 내고 같은 국민인데 왜 누군가는 훨씬 더 어렵게 살아야 할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죠.”
그는 “정부가 못 하는 일을 민간이 대신하는 구조”에 대해 복합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쉬운 정보는 분명 공공의 책무다. 하지만 동시에 산업이 되어야 한다고도 말한다. “플레이어가 많아져야 해요. 그래야 서비스 질도 올라가고, 실제 필요한 정보가 훨씬 다양하게 만들어질 수 있어요.” 실제 영국에는 쉬운 정보 전문 제작 업체가 20여곳 있다. 같은 정책 정보를 여러 업체가 각기 다른 형식으로 제작한다. 어떤 자료는 그림 중심이고, 어떤 자료는 사진 중심이다. 이용자는 자신에게 맞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

한국은 아직 걸음마 단계다. 발달장애인법에 관련 조항은 있지만, 국가 차원의 기준도, 인증 체계도, 전담 기관도 없다. 6·3 지방선거가 다가오는 상황에서, 발달장애인 유권자들을 위해 후보자들이 좀 더 ‘쉬운 공약’을 제공해야 한다는 요구도 나오지만, 정작 ‘쉬운 정보’의 정의 자체가 제도적으로 정리돼 있지 않다.
백 대표는 정부가 해야 할 역할을 분명히 제시했다. “민간이 쉬운 정보를 다양하게 만들 수 있어요. 하지만 공공은 기준을 만들고 품질을 관리해야 합니다.” 그는 정부 인증 체계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예컨대 일정한 제작 공정과 당사자 검수 절차를 거친 기관에 ‘쉬운 정보 전문기관’ 인증을 부여하는 방식이다. 다만 초기에는 공공 역시 민간의 경험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지금은 오히려 공공보다 민간에 노하우가 더 많아요. 그러니 초기 연구와 표준화 과정에는 저희 같은 기관이 참여해야겠죠.”
소소의 쉬운 정보 제작 과정에도 반드시 발달장애인 당사자가 참여한다. 내부에서는 이를 ‘감수’라고 부른다. 아무리 쉽게 만들었다고 해도 실제 당사자가 읽으며 막히는 부분이 반드시 나온다는 것이다. 제작의 시작과 끝에 당사자가 존재해야만 비로소 ‘쉬운 정보’가 완성된다고 그는 강조했다.
현재 회사는 상근 직원이 20명으로 불어날 만큼 커졌다. 하지만 정부의 재정 지원은 오래전에 끊겼다. 사회적기업 초기 지원이 끝난 뒤에는 자력으로 시장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매출도 안정적이지 않다. 정기 계약보다 프로젝트 단위 의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장애인 복지 활동가로서의 사명감과 경영자로서의 고충은 현실에서 종종 충돌한다. 그는 자신의 일곱번째 저서(공저 포함)인 ‘쉬운 정보’에 이렇게 썼다. “회사를 시작하는 일보다 수만배 더 고된 것은 세워진 회사를 멈추지 않고 키워 나가는 일이었다. 그리고 ‘키운다’는 말의 뜻은 결국 사람을 책임진다는 것임을, 그것이야말로 경영의 본질임을 나는 이 뜨거웠던 시절을 통과하며 처음으로 배웠다.”

소소가 코로나19 시기 제작한 ‘쉬운 배달앱 사용법’은 발달장애인뿐 아니라 고령층, 디지털 약자, 외국인 노동자들에게까지 호응을 얻었다. 그는 그 경험을 통해 쉬운 정보가 특정 장애 유형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쉬운 정보는 마치 ‘유니버설 디자인’(연령, 성별, 국적, 장애 유무와 관계없이 모두가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제품, 환경, 서비스 설계)처럼 결국 모두에게 필요한 거였어요.”
최근에는 박물관·미술관과의 협업도 늘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현대미술 전시 설명이 너무 어렵다는 문제의식에서 쉬운 해설 제작을 의뢰했다. 발달장애인 역시 문화 향유와 지적 욕구를 가진 시민이라는 점에서다. 소소는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쉬운 정보 변환 플랫폼 ‘온글’도 개발해 21일 온라인 설명회와 함께 기업 간 거래(B2B)용으로 출시했다. 원문을 입력하면 쉬운 문장 구조로 변환해주는 시스템이다. 다만 그는 인공지능의 한계도 지적했다.
“인공지능은 사람을 상상하면서 글을 쓰지 않아요. 그런데 쉬운 정보는 ‘사람 중심’이어야 합니다. 사용자가 이해할 수 있을까, 실제 삶에서 사용할 수 있을까를 계속 상상해야 하거든요.”
그는 인공지능 시대가 비장애인에게는 편리함을 확대하겠지만,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정보 격차를 오히려 더 벌릴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그가 꿈꾸는 미래는 단순한 기술 발전이 아니다. 쉬운 정보가 사회의 기본 인프라가 되는 사회다. 누구나 정보를 이해하고, 선택하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사회다.
그는 회사 이름의 뜻을 이렇게 설명했다. “발달장애인들이 쉬운 정보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고 공감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저희가 바라는 건 결국 그런 사회예요. ‘소소한 소통’이 가능한 사회.”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