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3개 복층 테라스’를 향한 로망
‘투룸’에서의 행복…족쇄가 된 빚
물건 비워내고 ‘원룸’에서 재출발

나를 키우는 중입니다
“인생은 산 넘어 산 넘어, 산 넘어 산이에요.” 내게 큰 위안을 주었던 상담사와 대화 중 튀어나온 말이었다. 등산 중 만나는 평지는 달콤하다. 인생의 상승 지점처럼 보이던 오르막은 돌아올 때 내리막이 되고, 편히 여겼던 내리막은 지친 걸음으로 돌아올 때 다시 가파른 오르막이 된다. 인생의 지형도 이와 다르지 않다.
내 인생을 산으로 본다면 꽤 다사다난했다. 눈물로 언덕을 올라 고지에 닿으면 잠시 바람이 눈물을 말려주다가도, 금세 가파른 내리막을 만났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정신없이 내려오다 보면 또다시 앞을 가로막는 언덕에 한숨이 나왔다. ‘혼자 살아도 이리 버거운데, 아이는 어떻게 낳아 기를까. 툭하면 인생에서 하산을 바라는 내가 누군가를 책임질 자격이 있을까?’ 들쭉날쭉한 청년기를 보내며 나는 ‘기대하지 않는 마음’을 배웠다.
사실 처음부터 인생에 대해 냉소적인 것은 아니었다. 마음 가운데 소망과 꿈이 빵처럼 부풀던 때도 있었다. 스무살에 자립해 십년간 열번의 이사를 했다. 때로는 공사를 이유로 쫓겨나고, 갑작스러운 사고로 보증금을 빼야 할 때도 있었다.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방에서도 주문처럼 외던 문장은 ‘스리룸(방 3개) 복층 테라스’였다. 작은 정원을 가꿀 수 있는 테라스만 있다면 없던 힘도 생겨날 것 같았다. 분리형 원룸, 거실과 방 하나, ‘투룸’(방 2개)을 거쳐 스물아홉, 마침내 나는 꿈에 닿은 ‘투룸 복층 테라스’ 집에 살게 되었다.
만족감은 형언하기 어려웠다. 밤에는 별이 보이고, 낮에는 바람이 통하는 테라스를 예쁘게 가꾸고 나니, 더 이상 원하는 게 없을 정도였다. 꽃도 심고, 나무도 심고 겨울에는 그 위로 소복하게 쌓이는 눈을 보다가, 다 얼어 죽은 줄 알았던 나무가 봄에 다시 잎을 피워내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경이로웠다. 특히 누군가를 초대해 ‘로망의 자취방’이라는 감탄을 들을 때면, 넓은 집이 마땅히 제 역할을 하는 것 같아 기뻤다.
그러나 그 만족은 2년이 채 되지 않아 마침표를 찍어야 했다. 퇴사와 함께 찾아온 무리한 대출 이자와 월세는 버거운 족쇄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회사에 다닐 땐 바빠서 누리지 못했던 집을, 퇴사 후 시간이 많아지니 떠나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예쁘게 가꾼 공간을 원상 복구하느라 보증금이 깎여 나가고, 로망이었던 가구들을 당근마켓에 헐값으로 넘기며 나는 비로소 내가 쥐고 있던 ‘무게’를 깨달았다.

벤저민 하디는 저서 ‘퓨처 셀프’에서 “성공의 함정에 빠진 사람들은 더 비싼 차, 더 넓은 집을 소유하려다 결국 그 물건들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자유를 팔아치운다”고 지적한다. 사회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한강 전망 아파트'나 ‘외제 차' 같은 특정 소유물을 성공의 척도로 제시하지만, 그 기준이 정말 자신이 원하는 모습인지 점검할 시간은 늘 부족하다. 목표로 정한 삶, 어쩌면 전시용일지 모를 그 삶을 위해 현재 자신의 시간을 녹여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라는 돌아오지 않는 가치를 바쳐 도착한 곳이 원하던 삶이 아닐 때, 우리는 비로소 뒤를 돌아본다.
책에는 흥미로운 실험이 등장한다. ‘생물학적 사이버네틱스’의 과학자들은 실험 참가자들을 울창한 숲으로 데리고 가 “직선으로 걸어가라”는 간단한 지시를 했다. 표지판이 없는 숲에서 참가자들은 자신의 방향감각을 확신했지만, 위성항법장치(GPS) 분석 결과, 그들은 지름 20미터 이내의 원을 그리며 걷고 있었다. 믿을 만한 단서가 없으면 인간은 직선이 아닌 원을 그리며 방황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저자는 이 실험을 인용하며 인생도 이와 마찬가지임을, 명확한 목표와 목표를 이루는 과정을 측정할 방법이 없다면 원을 그리며 방황하게 될 것임을 주장했다.
얼마 전, 아파트에 대한 놀라운 통찰을 들었다. 아파트는 구조상 우리 집의 천장이 윗집 바닥이고, 우리 집의 바닥은 윗집의 천장이기에, 공유하지 않고 온전히 소유하는 것은 고작 ‘벽’이라는 것. 결국 사람들은 수억원을 들여 몇개의 벽을 사기 위해 자유를 저당 잡히고, 그 벽에 배치할 물건들을 사기 위해 일상의 소중한 시간을 소모한다는 것이다. 타인의 기준에 맞춘 그럴듯한 벽을 갖는 것이 곧 행복이라 믿으면서 말이다.
위탁가정에서 자란 나는 늘 ‘나만의 공간’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스리룸 복층 테라스’라는 목표를 향해 직선으로 걷고 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원룸으로 이사를 앞두고 가구와 물건들을 정리하며, 물건들의 80%가 나에게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언젠가 쓰겠지’ 하고 저렴하다는 이유로 사 모았던 생필품들은 고스란히 유통기한이 지나 버려야 했고, ‘누군가 놀러 올 때 필요하겠지’ 하고 여러개 사 두었던 물건들은 한두번 쓰고 구석에서 먼지만 기다렸다. ‘언젠가’라는 명제를 뺐을 때, 나에게 필요한 공간은 원룸이면 충분했다.
원룸으로 이사 온 지 열흘이 되었다. 이번 이삿날을 넓은 집을 유지하기 위해 자유를 지불하던 거대한 원에서 탈출한 기념일로 지정할까 한다. 나는 요즘, 집에 오는 걸음이 무척 가볍다. ‘작은 집에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짐들을 수납할까?’ 고민하며, 현실판 테트리스를 즐긴다. 가장 큰 불행은 내가 무엇을 가졌는지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비극적인 것은, 내가 가진 짐이 나를 어디로도 가지 못하게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평생 원을 그리며 사는 것이다.
이사 온 집은 오후 4시경 딱 한 시간 정도 해가 창가에 닿는다. 온종일 햇살이 들어오던 동남향 집에 살 때에는 잊고 살았던 한 줄기 빛의 소중함을 마음에 담아본다. 나는 이제 작은 창 하나로도 충분히 계절을 읽고, 비워낸 만큼 새로운 삶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다. 산 넘어 산인 인생에서, 때로는 가장 가벼운 배낭을 멨을 때 비로소 정상의 풍경이 눈에 들어올 테니 말이다.
싱어송라이터 모유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