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절로, 선운사' 현장…32대 1 경쟁률 뚫고 모인 청춘들의 인연 찾기

[촬영 나보배]
(고창=연합뉴스) 나보배 기자 = 붉은 기운을 머금기 시작한 동백나무 아래로 팥죽색 법복을 차려입은 청춘남녀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토요일인 지난 28일 이른 오전, 고요하던 고창 선운사 경내에 묘한 어색함과 긴장감이 일렁였다.
벌써 4년째, '결혼 2커플, 2커플 결혼 예정'이라는 경이로운 성적표를 내며 조용한 인기몰이 중인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복지재단(이하 재단)의 '나는 절로' 현장이다.
스무 명의 청춘은 일주문을 넘으며 속세의 이름을 잠시 내려놓고 고창의 명물인 '장어'와 '동백'이라는 새 이름표를 달았다.
이번 참가자들의 경쟁률은 32대 1. 640여명의 남녀 지원자 중 '인연을 만나려는 마음이 가장 간절하고 열려 있는 이들을 엄선했다'고 재단 관계자가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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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욕지족, 현재에 만족하고 욕심을 내려놓으라는 가르침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욕심을 내보려 합니다."
한 남성 참가자의 비장한 자기소개에 현장을 이끄는 재단 유철주 위원이 큰 소리로 화답하며 분위기를 돋웠다.
"우리는 불교지만, 나는절로에서만큼은 소욕지족을 권하지 않아요. 1박 2일 동안 사랑을 쟁취하세요."
유난히 따스한 햇볕과 졸졸 흐르는 고요한 시냇물 소리 덕분이었을까. 일대일 데이트가 거듭될수록 굳어있던 참가자들의 안색이 조금씩 밝아졌다.
묘한 우연도 겹쳤다. 무작위였는데, 세 번의 기회 모두 같은 상대와 마주 앉은 커플도 등장했다.
주변에서는 "인연이다"며 너스레를 떨었고, 당사자들의 얼굴에는 '정말 인연인가'하는 신기함과 '다른 참가자들도 더 만나보고 싶은데'하는 아쉬움이 교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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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공양이 끝난 뒤 찾아온 입재식(불교에서 정진, 기도, 교육 과정 등을 시작할 때 마음을 다잡는 의식).
도륜스님이 "사계절 포근한 선운사는 마음을 닦고 인연을 맺기에 더없이 좋은 공간"이라며 "진심 어린 마음으로 서로를 알아가는 소중한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축원했다.
정갈한 다과상을 사이에 두고 앉은 '1:1 로테이션 차담' 시간에는 "고양이 좋아하세요", "퇴근 후에는 주로 뭘 하세요?" 같은 조심스러운 탐색전이 오갔다.
각종 연애프로그램으로 단련된 세대라지만, 막상 정적 속에서 마주한 인연 앞에선 대화가 서툴기만 했다.
매끄럽지 못한 대화가 겉돌 때마다 귀중한 시간을 흘려보내는 참가자들의 얼굴엔 초조함도 스쳤다.
"'좋은 인연 찾으러 왔어요' 같은 당연한 말 말고, 서로를 확실히 알 수 있는 대화가 오갔으면 좋겠는데 마음처럼 쉽지 않다"며 아쉬움을 감추지 않기도 했다.

[촬영 나보배]
조심스러운 탐색전 탓이었을까. 부처님의 가피는 아직 산의 어귀를 넘지 못한 듯 보였다.
설레던 차담이 끝난 뒤 확인한 스무명의 '사랑의 작대기'는 야속하게도 단 하나도 맞물리지 못한 채 모두 어긋났다.
애가 타는 것은 참가자뿐만이 아니었다. 재단 관계자들은 남성 참가자가 곧장 마음에 드는 여성 참가자에게 직진하는 '정공법'으로 방식을 바꿨다.
"주저하는 사이, 연인은 멀리 도망간다"는 유 위원의 엄포에 용기를 낸 한 남성 참가자가 앞으로 나왔다.
'정동백 나가자!'는 자신감 있는 목소리가 선운사의 정적을 깨뜨렸다.
비로소 정성이 닿은 것인지, 유난히 별이 빛나던 밤 선운사 경내를 산책하는 참가자들의 대화 소리는 한층 다정해졌다.
어느새 대화의 주제는 "선운사 앞에 있던 카페 보셨어요? 내일 시간 괜찮으시면 같이 가실래요?", "배드민턴 좋아하시면 같이 칠까요?" 등의 제안으로 옮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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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짧은 밤을 지새우고 맞이한 아침. 누군가의 얼굴엔 안도감이, 누군가의 눈에는 대화가 부족했다는 조급함이 서렸다.
드디어 운명의 최종 선택 시간. "밤 데이트 때 시선이 머무는 곳을 보면 답이 나온다"던 재단 관계자의 예상대로 선운사에서는 최종 6커플이 탄생했다. 결혼정보회사 못지않은 60%의 높은 성사율이었다.
그럼에도 인연을 찾지 못한 이들의 박수 소리에는 아쉬움이 묻어 나왔다.
"차담 시간이 짧아 자기소개만 하다 끝나 버렸다", "더 적극적으로 다가갔어야 하는데"하는 뒤늦은 후회도 들려왔다.
하지만 인연이 닿지 않았다고 해서 얻은 게 없는 건 아니다.
한 남성 참가자는 "무료했던 삶에 '연애 세포'가 깨어난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다. 선운사 밖에서도 더 열심히 인연을 찾아보겠다"며 재단에 나지막이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warm@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