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780시간의 공짜

시작은 이렇게 됐어요

한 여성이 간호조무사가 되기 위해 병원에 실습을 나갔어요
간호학원에서 이론 교육을 받은 뒤 2022년 4월부터 약 4개월 반 동안 병원에서 실습 교육을 받았죠
총 시간은 780시간이었어요
매일 출근해서 환자를 안내하고 맥박과 혈압을 재고 의료폐기물을 비우고 대기실을 소독하고 기구를 소독하는 일을 했어요
누가 봐도 병원이 정상적으로 굴러가기 위해 꼭 필요한 업무들이었죠
그런데 이 여성은 이 기간 동안 단 한 푼도 받지 못했어요
자격증을 따기 위한 필수 과정이었기 때문이에요
문제는 여기서 시작돼요
이 여성은 나중에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냈어요
자신이 실습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병원 인력을 대체하는 노동을 했다며 최저임금을 달라고 요구한 거예요
그 금액은 약 714만원이었어요

 

1심과 2심이 정반대로 갈린 이유

1심 법원은 절반은 손을 들어줬어요
전체 780시간 중 근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시간을 절반인 390시간으로 보고 병원이 부당이득을 반환해야 한다고 판단했어요
당시 최저시급을 적용해 약 357만원을 지급하라고 했죠
그런데 항소심에서 결과가 완전히 뒤집혔어요
서울북부지방법원 항소심 재판부는 이 실습이 처음부터 근로 제공을 목적으로 한 게 아니라 교육 훈련을 목적으로 했을 뿐이라고 판단했어요
근로계약을 체결한 적도 없고 병원이 급여를 지급한 적도 없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죠
게다가 실습생의 업무 능력이 미숙했기 때문에 간호사나 간호조무사 1명 이상이 항상 옆에서 지켜봤다는 점도 근거로 삼았어요
결국 병원이 실습생의 노동으로 이익을 얻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결론이었어요
1심에서 인정됐던 부당이득 반환 의무도 완전히 사라졌어요

 

전문가들이 이 판결에 제동을 건 이유

이 판결이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노동법 전문가 두 명이 이 판결을 정면으로 비판했어요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의 박현서 교수와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의 최정은 교수예요
두 사람은 한국노동연구원에 낸 노동판례리뷰 보고서에서 이 판결의 논리적 허점을 지적했어요
가장 핵심적인 지적은 이거예요
우리 대법원이 근로자성을 판단하는 원칙은 계약서가 있는지 없는지 같은 겉모습이 아니라 실제로 그 관계가 종속적인 노동 제공에 해당하는지를 살펴보라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항소심은 근로계약을 체결하지 않았다는 점 자체를 근로자성을 부정하는 핵심 근거로 삼았죠
두 교수는 이 부분이 대법원 판례의 취지와 어긋난다고 봤어요
계약이라는 형식이 있고 없고가 실질을 뒤집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는 거예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780시간의 공짜

단순 반복 업무에 780시간이 정말 필요할까

두 교수가 던진 질문 중에 가장 뼈아픈 대목이 있어요
실습생이 병원에서 한 업무가 처음부터 780시간이나 되는 교육이 필요할 만큼 복잡한 일이었는지를 되묻은 거예요
환자 안내나 혈압 체크나 소독 같은 업무는 숙련도가 필요하긴 하지만 지나치게 단순하고 반복적인 성격이 강해요
두 교수는 병원이 이런 실습생의 노동력을 활용해서 실제로는 인건비를 아껴온 것 아니냐고 지적했어요
다시 말해 이름은 교육이지만 실질은 저비용 인력 운용이었을 가능성을 짚은 거예요
이 지점이 이번 판결 논란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어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780시간의 공짜

234시간까지는 학원에서 대체 가능해졌지만

이번 판결과 별개로 제도 자체도 조금씩 바뀌고 있어요
지난해 제정된 간호법 시행규칙에 따르면 780시간의 실습 중 최대 234시간까지는 정부가 인증한 훈련기관의 실습 과정으로 대체할 수 있게 됐어요
언뜻 보면 실습생 보호를 위한 개선처럼 보이지만 나머지 546시간은 여전히 병원 현장에서 채워야 해요
근본적으로 무급 실습이라는 구조 자체가 바뀐 건 아니라는 뜻이에요
제도가 손을 대긴 했지만 핵심은 건드리지 못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예요

 

고용노동부 가이드라인은 왜 힘을 못 썼을까

사실 고용노동부에는 이미 관련 가이드라인이 있어요
일경험 수련생에 대한 법적 지위 판단과 보호를 위한 가이드라인이라는 이름이에요
이 가이드라인을 보면 직무교육 프로그램 없이 업무상 필요에 따라 수시로 업무를 지시하면서 수련생의 노동력을 활용하는 경우에는 노동법적 보호 대상인 근로자로 볼 수 있다고 명시돼 있어요
이번 사건에 대입해보면 실습생이 수행한 업무가 정말 체계적인 교육 프로그램 안에서 이뤄졌는지 아니면 병원 운영에 필요한 인력 공백을 메우는 방식으로 활용됐는지가 핵심 쟁점이 되는 거예요
하지만 법원은 이 가이드라인의 취지를 깊이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고 있어요
가이드라인은 존재하지만 실제 재판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 셈이에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780시간의 공짜

병원 입장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어요

한편으로는 병원 쪽 입장도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병원은 간호학원의 위탁을 받아 실습 교육을 진행했을 뿐이고 실습 기간이나 요일이나 교육 시간 같은 세부 사항은 모두 학원 쪽에서 정해서 통보한 구조였어요
병원이 자발적으로 실습생을 저비용 인력으로 쓰기 위해 설계한 시스템은 아니라는 거예요
게다가 실습생의 미숙한 업무 능력을 보완하기 위해 인력을 한 명 더 붙여서 감독하게 했다는 점에서는 병원도 나름의 부담을 졌다고 볼 여지가 있어요
결국 이 문제는 병원 한 곳의 도덕성 문제라기보다는 실습 위탁 구조 전체의 설계 문제에 더 가까워 보여요

 

고찰 생각 

저는 이번 판결을 보면서 형식과 실질이 충돌할 때 법이 어느 쪽 손을 들어줘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떠올리게 됐어요
계약서에 서명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이 겪은 노동의 실체까지 부정되는 게 맞는 걸까요
780시간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아요
하루 8시간씩 계산해도 거의 100일에 가까운 시간이에요
그 시간 동안 환자를 직접 상대하고 병원 업무의 일부를 실제로 수행했다면 그건 이미 교육의 영역을 넘어선 노동일 가능성이 높다고 봐요
물론 자격증을 따기 위한 필수 과정이라는 특수성은 인정해야 해요
하지만 필수 과정이라는 이유로 무급이 정당화된다면 앞으로도 비슷한 구조의 다른 자격증 실습 제도들이 같은 논리로 노동력을 값싸게 쓰는 통로가 될 위험이 있다고 생각해요

 

질문

만약 여러분이 780시간 동안 병원에서 환자를 상대하고 소독과 안내와 혈압 체크 같은 업무를 실제로 수행했는데 그 대가로 단 한 푼도 받지 못했다면 그걸 순수한 교육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그리고 계약서에 서명이 없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노동의 가치가 없었던 일이 되는 게 맞다고 생각하시나요
이번 판결이 앞으로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자격증 실습생들에게는 어떤 신호로 읽힐지 여러분의 생각이 궁금해요

댓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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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둥둥다#x1tC
    너무처우가별로인것같아요
    법개정이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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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쟈수#JB5f
    진짜 말도 안되죠 이 사실자체가 분노가 치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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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바람
    계약직도 이런경우 많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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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트임
    간호조무사 태움도 그렇고 참 안타까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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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하수#4m61
    의료쪽은 항상 문제가 많아보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