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의 상징 넘어 관계의 무대로…'DMZ 오픈 전시: 스테이징'

안규철·박찬경 등 14명…회화·영상·설치로 분단·냉전·이동의 제약 조명

캠프그리브스·임진각 평화누리 일대서 11월 29일까지

아브라함 크루즈비예가스의 '눈먼 자화상' 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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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벽 한가운데서 시작한 푸른색 종이들이 나선을 그리며 바깥으로 퍼져 나간다. 멕시코 작가 아브라함 크루즈비예가스의 '눈먼 자화상' 연작으로 멕시코에서 한국의 비무장지대(DMZ)까지 오는 여정에서 모은 신문과 전단, 엽서, 티켓 등으로 만들었다.

종이 한쪽 면은 유엔(UN)을 상징하는 푸른색으로 칠해져 있고, 글자와 그림이 있는 면은 벽을 향하고 있다. 관람객은 종이를 들어 올려야만 그 안에 어떤 내용이 담겼는지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DMZ가 남북을 가르는 선이자 정보가 선별되어 드나드는 관문이듯,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정보가 어떻게 가려지고 재배열되는지 질문한다.

'DMZ 오픈 전시: 스테이징' 전시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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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와 파주시가 12일부터 파주 캠프그리브스 일대와 임진각 평화누리에서 현대미술전시 'DMZ 오픈 전시: 스테이징'을 연다.

국내외 작가 14명이 참여해 회화와 사진, 영상, 설치 등 26점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분단과 전쟁의 역사를 되짚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과 생명, 사물의 관계를 들여다본다.

전시 제목인 '스테이징'(Staging)은 프랑스 과학기술학자 브뤼노 라투르의 개념에서 가져왔다. 흔히 무대 연출을 뜻하는 말이지만, 전시에서는 어떤 존재와 사실이 특정한 조건과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과정을 의미한다. DMZ를 작품을 전시하는 배경으로만 보는 대신 인간과 비인간, 사물과 환경, 역사와 현재가 서로 관계를 맺는 무대로 바라보자는 취지다.

안규철 작가
(파주=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안규철 작가가 12일 파주 캠프그리브스 내 전시장에서 신작 '아홉 개의 의자'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2026.10.12. laecorp@yna.co.kr

안규철의 신작 '아홉 개의 의자'는 부재와 단절을 사물의 형태로 드러낸다.

작가는 온전한 의자 8개에서 다리와 등받이, 좌판 등을 떼어내고 그 파편을 모아 아홉 번째 의자를 만들었다. 하지만 새로 만들어진 의자 역시 제 기능을 하기에는 불완전하다. 온전했던 의자 8개가 해체되고 9개의 망가진 의자가 탄생한 셈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안규철은 "멀쩡한 의자들을 망가뜨려 9개의 망가진 의자를 만든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상황이 DMZ의 모습과 닮았다고 생각했다"며 "DMZ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사는 사람들도 결함이 있는 상태로 살아간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박찬경 작가
(파주=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박찬경 작가가 12일 파주 캠프그리브스 내 전시장에서 작품 '블랙박스: 냉전 이미지의 기억'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2026.10.12. laecorp@yna.co.kr

박찬욱 감독 동생인 박찬경의 '블랙박스: 냉전 이미지의 기억'은 사진과 글을 통해 냉전 시대의 기억을 되짚는 작품이다. 1997년 첫 개인전에서 선보인 작업을 이번 전시를 위해 재제작했다.

사진에는 할리우드 영화 속 간첩의 모습부터 미군 부대 주변에서 촬영한 장면, 장난감 권총과 책 등을 땅에 묻은 모습까지 다양한 이미지가 담겼다. 작가는 간첩의 시선으로 주변을 바라보거나 사물을 숨기는 행위를 통해 냉전 시대의 불안과 반공 이데올로기가 개인에게 미친 영향을 탐색했다. 사진 아래에 붙은 글은 이미지에 또 다른 의미를 더한다.

전시장에서 만난 박찬경은 "사진과 글을 함께 봐야 하는 작업"이라며 "30년 전에 만든 작품인데 지금도 여전히 현실을 이야기한다는 게 슬프다. 더는 이런 작업을 할 필요가 없는 날이 오면 좋겠다"고 말했다.

선무 작 '봄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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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무의 '봄놀이'에서는 남북 청소년들이 한 강가에 모여 음식을 만들고 어울린다.

북한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탈북한 작가는 북한 선전화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시각 언어를 빌려 분단과 이데올로기의 경계를 다뤄 왔다.

체제를 찬양하는 데 쓰였던 형식은 이 작품에서 함께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의 풍경으로 바뀐다. 서로 다른 체제 아래 살아온 이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장면은 분단 너머의 만남을 상상하게 한다.

이요나 작 '대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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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요나의 설치 '대기실'은 이동의 자유가 제한된 현실을 공간으로 구현한다.

신호등과 가로등, 버스 손잡이, 도로 반사경처럼 이동과 도시 생활을 떠올리게 하는 사물들이 스테인리스 파이프로 만든 닫힌 구조 안에 얽혀 있다.

바깥으로 뻗어 나가야 할 파이프는 내부에서 거듭 꺾이며 길을 잃는다. 이동을 돕는 사물들이 갇힌 공간에 놓인 모습은 남북을 자유롭게 오갈 수 없는 현실의 역설을 드러낸다.

'DMZ 오픈 전시: 스테이징' 전시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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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도 미국 참전용사와 가족의 삶을 기록한 윤수연의 '홈커밍' 연작과 외할머니의 뇌파 데이터를 바탕으로 백자를 제작해 개인의 삶에 남은 역사의 흔적을 되짚는 정가희의 '할머니/가보', 군사 시설을 덮으며 자라난 이끼의 시선으로 전쟁 이후의 생명과 시간을 상상하는 자닌 랜더슨의 '비무장화하는 이끼', 군대가 만들어내는 남성성을 다룬 연진영의 설치 작품 등이 전시된다.

전시를 기획한 김선정 아트선재센터 예술감독은 "DMZ를 분단과 갈등의 상징을 넘어 인간과 비인간, 역사와 현재가 서로 관계를 맺는 역동적인 장소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는 11월 2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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