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이스라엘-이란 전쟁 여파로 석유화학 제품의 핵심 원료인 나프타 수급이 불안정해지자, 의약품 포장재 부족 사태에 직면한 제약업계가 ‘의약품 소포장 생산 의무’를 한시적으로 완화해달라고 촉구하고 나섰다. 환자 안전과 재고 관리를 위해 도입된 규제가 포장재 수급난 상황에서는 오히려 생산 차질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15일 한겨레 취재를 종합하면, 이달 초 제약사들은 산업통상부‧보건복지부‧식품의약품안전처 관계자와 함께한 간담회 자리에서 “의약품 소량포장 공급 의무를 한시적으로 완화해달라”고 요청했다. 현행 ‘의약품 소량포장단위 공급에 관한 규정’은 연간 의약품 제조·수입량의 10% 이상을 소량포장단위로 약국에 공급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병포장의 경우 30정 이하, 낱알 모음 포장은 100정 이하, 시럽제는 500mL 이하가 기준이다. 이는 약국의 과다 재고와 재고 폐기를 줄이고, 의약품 오남용을 막으려는 취지로 도입됐다.
하지만 최근 중동 사태로 나프타 수급에 차질이 빚어지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플라스틱 용기와 필름 등 포장재 생산이 지연되거나 중단되면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소포장은 자원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것이 업계의 공통된 목소리다. 대용량 포장에 견줘 같은 양의 약을 담는 데 더 많은 포장재를 써야 하기 때문이다. 제약업계 한 관계자는 “자체 분석 결과, 현재 10%인 소포장 비율을 0%로 낮출 경우 300정 이상 들어가는 병을 20만개 이상 추가로 생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아낀 포장재를 소아용 시럽제 등 소용량이 필수적인 품목에 우선 배분하면, 소아용 의약품 공급 안정성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포장재 수급난이 제약사에 압박으로 이어지는 것은 전문의약품의 가격 결정 구조 영향도 있다. 현재 전문의약품은 보건복지부가 정하는 상한 금액을 넘겨 판매할 수 없다. 식품‧화장품 등 다른 업계의 경우 포장재나 원자재 가격 상승분을 제품 가격에 일부 반영할 수 있지만, 제약사가 원가 상승을 이유로 약값을 임의로 올리는 것은 불가능한 구조다.
소포장에 대한 예외 규정도 있다. 의약품 수급 차질이나 안정성 문제 등이 발생했을 때, 식약처장이 인정하는 범위에서 소량포장 의무 예외가 인정된다. 제약업계가 “전쟁에 따른 나프타 수급 차질은 명백한 수급상 곤란 사유”라며 한시적 예외 적용을 요청하는 배경이다.
반면, 약국가에서는 이에 대해 반대 목소리가 나온다. 현실적인 재고 관리 부담과 규제 후퇴 가능성 때문이다. 한 약국 관계자는 “전문의약품은 처방에 의해서만 소진되는 특성상, 대용량으로만 공급받을 경우 재고가 발생해 약국의 경제적 손실을 물론, 사회적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며 “원자재 수급난이라는 특수성은 이해하지만, 한번 완화된 규제 기조가 고착돼 향후 환자 안전과 조제 편의를 저해하는 결과로 이어질까 우려된다”고 했다.
식약처는 업계의 고충을 인지하고 있으며 조속히 합의점을 도출하겠다는 방침이다. 식약처 관계자는 “포장재 수급 불안에 따른 제약업계의 애로사항을 해소하기 위해 관련 협회‧단체와 긴밀히 소통하고 있다”며 “의견 수렴이 마무리되는 대로 행정지원 추진을 적극 검토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주빈 기자 ye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