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일 개봉한 ‘내 이름은’은 올해 팔순의 정지영 감독이 왜 여전히 중요한 현역 연출자 중 한명인지 입증하는 영화다. 제주 4·3이라는, 투자자들이 꺼리는 무겁고 불편한 소재를 스크린의 전면에 끌고 오는 용기는 그중 매우 작은 부분이다. ‘내 이름은’은 4·3의 비극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당시의 국가폭력과 반세기 뒤 학교폭력을 실타래처럼 엮으며 집단폭력은 어떻게 탄생하고 세습되는지를 보여주는 야심 찬 기획이다. 배우 염혜란을 통해 피해자와 가해자를 이분법으로 나누는 전형을 탈피하면서 4·3에 대한 상상력을 한층 풍요롭게 일군다. 앞으로 더 다채로워져야 할 4·3에 대한 이야기와 예술적 도전에 있어 하나의 분기점이 될 만한 작품이다.
현재 시점의 주인공들이 제주 고향에 모이는 액자식 구성으로 시작되는 영화는 1998년으로 넘어가 고등학생 영옥(신우빈)과 희끗한 머리의 나이 든 엄마 정순(염혜란)을 비춘다. 1998년은 4·3 사건 50주년을 기리는 첫 합동위령제가 열리면서 공론화가 시작된 해다. 촌스러운 이름에 불만이 많은 것 말고는 지극히 평범한 학생인 영옥은 서울에서 온 전학생 경태(박지빈)의 독선적 모습에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그의 지원으로 반장이 되고, 친했던 모범생 친구 민수(최준우)와 껄끄러워진다. 가끔 원인 모를 어지러움과 통증을 느끼던 평범한 엄마 정순은 아들이 학교에서 쓰러지자 병원을 찾고, 정신과 의사(김규리)의 지원으로 기억에서 굳게 잠가놨던 1949년 봄에 열쇠를 꽂는다.

영화는 정순의 어릴 적 기억이 왜 삭제됐는지, 그 기억은 무엇인지, 하나씩 방문 자물쇠를 열고 들어가는 미스터리 형식으로 풀어나간다. 관객이 소재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도록 극적인 요소를 구성하면서 정순 역시 흔히 생각하는 전형적인 피해자, 생존자의 캐릭터를 넘어선다. 지난 14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염혜란은 재킷에 4·3을 상징하는 빨간 동백꽃 배지를 달고 있었다. 그는 “아픔이나 고통을 전면에 내세우는 인물이라면 망설였을 텐데, 어떤 불편함이 있을 뿐이지 고통의 기억을 묻어두고 산다는 게 평범한 현대 한국인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 (배역을) 선택하는 데 부담감은 없었다”고 말했다.
염혜란은 차세대 ‘국민 엄마’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데 대해 “감사하지만 하나의 프레임으로 규정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그가 연기한 정순은 이런 바람과도 맞닿는 인물이다. 습관처럼 뿜어내는 담배 연기가 모호하게 지워진 고통스러운 과거를 암시하지만, 정순은 유쾌한 여성이자 ‘쿨한’ 엄마다. 전형성의 틀을 깨기 때문에 아들이 휩쓸린 학교폭력과 자신이 어린 시절 겪은 국가폭력을 잇는 연결고리가 되고, 또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이분법의 벽을 허물고 고통과 죄의식이 공존하는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같은 날 만난 정지영 감독은 “제주 4·3을 겪은 분들 중에 실제로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됐던 이들도 적지 않고,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아직까지 식구들에게 꺼내지 못하는 분들도 많다. 또 가해자와 피해자가 지금까지 이웃으로 사는 경우도 있다”며 “이런 복잡한 정황과 특수성이 진짜 내 이름을 찾아간다는 영화의 모티브가 됐다”고 설명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포스터에도 등장한, 정순이 보리밭에서 춤을 추는 장면이다. 이를 위해 염혜란은 영화 제작 준비에 들어간 2년 전부터 한국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강풍기를 틀어놓기도 하고, 해 질 녘 배경으로 찍기도 하는 등 영화에서 가장 많은 회차를 촬영한 장면이기도 하다. 염혜란은 “감독님이 구체적인 디렉션을 주지 않아서 가장 어려웠던 장면”이라며 “결국 내가 표현해야 하는 건 동작이 아니라 마음이더라. 춤을 추면서 ‘저희들이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편히 쉬세요’ 이런 말들을 대사처럼 되새겼다”고 떠올렸다.

염혜란은 한강 작가의 4·3 소재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언급하며 ‘내 이름은’도 이 소설과 마찬가지로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나의 소중한 사람을 잊지 않겠다. 이 땅에서 없어진 사람을 내가 기억하고 있다’고 말하는 영화라고 생각해요. 이런 마음과 이야기가 많은 이들에게 위로를 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