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체 절대 조건이지만 잊히고 외면
현대화·도시화로 매년 수십억톤 유실
기피·정화 대상 아닌 역동적 지구 시스템

배정한의 공간이 전하는 말
맞다. 흙에도 이렇게 강한 냄새가 있었지. 손으로 흙을 보듬어 만진다는 게 이런 느낌이었지. 나의 신체로 흙을 밟으며 감각해본 게 얼마 만일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기획전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에 출품된 아사드 라자의 ‘흡수’(Absorption)는 흙의 존재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과 망각을 되돌아보게 한다.
인간이 지구 행성에서 거주하는 데 꼭 필요한 것 세가지가 무엇인지 질문하면, 물과 공기라는 답은 바로 돌아온다. 하지만 나머지 하나를 맞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답은 흙이다. 흙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생존하기 위한 절대적이고 근원적인 조건이다. 흙은 인간과 비인간이 서로의 존재를 승인하고 공존의 계약을 맺는 터전이다.
그럼에도 흙만큼 철저히 소외되고 무시당하는 존재도 드물다. 궂은일을 할 때, 모두가 꺼리는 일을 맡아 처리할 때, 흔히 ‘손에 흙을 묻히다’라고 표현한다. 먼지, 때, 오물, 배설물, 오염, 추문을 뜻하는 단어 ‘더트’(dirt)는 흙이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생명체에 영양분을 제공하고 물을 정화하며 탄소를 저장하는 경이로운 흙을 우리는 더럽고 추잡한 것으로 여겨온 것이다. 도시의 흙은 기피, 통제, 관리, 정화의 대상일 뿐이다. 매끈한 아스팔트 아래에서 흙의 세계가 얼마나 역동적으로 숨 쉬고 있는지, 발밑의 흙 속에 얼마나 복잡한 비인간 존재들의 우주가 담겨 있는지 우리는 놀라울 정도로 무관심하다.

영화 ‘마션’(감독 리들리 스콧, 2015)의 한 장면은 흙의 힘과 가치를 환기한다. 불모지 화성에 홀로 남겨진 식물학자 마크 와트니(맷 데이먼 분). 그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거주 공간의 부재나 첨단 기술 장비의 부족이 아니었다. 그가 사투를 벌이며 만들어낸 건 감자를 기를 ‘살아 있는 흙’이었다. 먼지에 가까운 화성의 표토는 광물 덩어리에 불과했지만, 지구에서 가져온 미생물과 인간의 배설물이 섞이자, 생명을 품을 수 있는 흙으로 탈바꿈했다. 흙에서 감자의 싹이 트는 순간, 화성이라는 낯설고 척박한 공간은 비로소 그의 ‘집’이 되었다. 와트니의 흙은 미생물과 유기체가 얽혀 일으킨 하나의 사건이자 생명의 시작점이었다.
이 정교한 생명의 그물망, 흙이 해체되고 있다. 미생물학자이자 토양학자인 조 핸델스만은 ‘흙이 사라진 세상’(지오북, 2025)을 통해 인류가 맞닥뜨린 치명적인 위기를 경고한다. 핸델스만은 흙을 ‘살아 있는 시스템’으로 정의한다. 토양은 지구의 풍화된 암석, 생명체, 유기물질, 대기가 끊임없이 교류하며 작동하는 복합적 네트워크다. 이 관계망 속에서 식물이 자라고, 물이 여과되고, 탄소가 저장된다. 그러나 현대식 농업과 도시화, 기후 변화로 인해 토양은 생성 속도보다 10배에서 100배 빠르게 소멸되고 있다고 한다. 매년 수십억톤의 흙이 유실되고 있는 현재의 속도라면, 인류가 건강한 토양에서 수확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은 60여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흙은 지구의 탄소를 흡수하는 거대한 스펀지이자 물을 정화하는 필터다. 그뿐만 아니라 흙은 도시와 문명의 기반이며, 인간과 비인간이 함께 얽혀 살아온 흔적이 켜켜이 쌓인 시간의 저장고다. 흙이 사라진다는 것은 농작물을 키울 땅이 없어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거주하는 장소의 토대 자체가 무너지는 상실의 증표이기도 하다. 핸델스만의 경고는 우리 시야와 인식의 범위 밖으로 밀려난 흙의 복권을, 일상의 삶과 흙의 관계 회복을 요청한다.

아사드 라자의 작업 ‘흡수’(2026)는 그러한 요청에 응답하며 도시의 일상과 조응하는 흙의 감각을 일깨운다. ‘흡수’는 미술관의 한 전시실 바닥을 흙으로 채운, 일종의 흙밭이다. 뉴욕과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가 서울에서 구한 다양한 재료와 폐기물을 섞어 네오소일(neosoil)이라 이름 붙인 비옥한 토양을 만들었다. 토양학자들의 실험과 자문을 거쳐 생성한 이 흙에는 커피 찌꺼기, 닭 뼈, 튀김 부스러기, 은행, 솔잎, 택배 상자, 이면지, 전선 피복 등 서울의 단면과도 같은 여러 물질이 얽혀 있다. 도시의 일상이 남긴 부산물들이 흙 속의 미생물들과 상호작용하며 분해되어 생명의 자양분이 된다.
상쾌하면서도 텁텁한 흙냄새로 가득 찬 전시실에서 작품을 체험하는 유일한 방법은 발이 푹푹 빠지는 흙밭을 가로질러 걷는 것. 신체가 흙에 빠져 흙과 직접 연결되지 않으면 다음 공간으로 이동할 수 없다. 물론 마음껏 만져도 된다. 손을 파묻고 흙을 감각하는 사람들, 아예 주저앉아 흙장난에 즐거워하는 아이들로 미술관이 북적인다. 관객의 경험이 작품에, 작품이 관객의 경험에 서로 참여하는 형식이다. 또 다른 참여자는 쇠스랑과 삽으로 흙밭을 일구고 고르며 관객과 대화하는 시민 경작자들이다. 나와 이야기를 나눈 경작자는 관악산에서 옮겨온 낙엽을 새로 섞었다는 소식을 전하며, 어느 연인의 이채로운 감상 방식 목격담을 곁들였다. “여자 친구가 구두에 흙 묻히길 꺼리자 남자 친구가 번쩍 안아 들고 전시장을 통과했어요.”
‘흡수’의 흙은 미술관에 고정된 오브제가 아니라 이동하는 물질이다.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필요한 만큼 흙을 가져가도 된다. 아사드 라자는 이렇게 말한다. “재생된 흙이 자유로이 흩어진다.” “공동의 경험이 새겨진 아카이브이자 그 토대인 흙을 되살리고 나누는” 행위를 통해 작품은 “분해에 내재하는 공동성의 계기를 보여준다.”
나도 작은 천 주머니에 흙을 담아 왔다. 절반쯤은 집 베란다의 화분에 섞었다. 남은 반은 주머니째 연구실 책상에 올려뒀다. 서울 어느 거리에 떨어진 나뭇잎, 이름 모를 시민의 일상, 누군가 남긴 음식, 관객들의 신발에 묻어온 도시의 흔적, 경작자들의 땀, 그리고 전시장의 공기가 뒤섞인 흙. 여러 시간과 공간이 얽힌 한 움큼 흙에 나의 일상이 연결되는 느낌.
배정한 서울대학교 조경학과 교수·‘공원의 위로’ 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