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8년여간 ‘삼성 2인자’로 불렸던 정현호 전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7일 물러나며 향후 삼성그룹의 변화에 관심이 쏠린다. 정 전 부회장의 뒤를 이은 후임자로 ‘재무통’으로 꼽히는 박학규 삼성전자 사장(사업지원실장)이 임명되면서, 앞서 삼성 안팎에서 제기됐던 ‘재무통 리스크’가 재연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다만 2인자의 이력보다, 구체적인 경영 목표 설정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리더십이 더 주요한 변수라는 지적이 나온다.
8년 만의 2인자 교체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는 삼성의 대표 ‘재무통 출신 2인자’였던 정 전 부회장에 이어, 후임인 박학규 사장 역시 재무통이라는 꼬리표가 붙어서다. 삼성 내에서 재무통 출신이 총수에 이은 2인자로 활동한 사례는 흔하진 않다. 삼성의 초대 재무통 2인자로 여겨지는 인물은 이학수 전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장·전략기획실장(부회장)이다. 다만 이 전 부회장은 통상적인 경영 활동 외에 그룹 비자금 및 승계 등에 깊숙이 관여한 총수 일가의 ‘금고지기’ 성격이 강했다.
정현호 전 부회장은 재무통 출신 중에선 이 전 부회장에 이어 10여년 만에 그룹 2인자에 오른 인물이다. 삼성 비서실 재무팀에서 주된 경력을 쌓고 그룹 컨트롤타워인 옛 그룹 미래전략실 팀장을 지냈다. 국정농단 사태 이후인 2017년부터 최근까지는 삼성전자 사업지원티에프(TF)장을 맡았다.
정 전 부회장을 향한 삼성 안팎의 주된 비평은 재무 전문가인 그가 보수적인 경영 판단을 주도하며 반도체 투자 실기 등 이른바 ‘삼성의 위기’를 초래한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정 전 부회장이 2인자로 활동한 시기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국정농단 사건과 불법 승계 의혹 등으로 법정 구속 및 재판을 받던 때와 맞물린다. 기술 전문성이 낮은 정 전 부회장의 소극적인 투자 결정으로 삼성의 ‘초격차’도 흔들렸다는 평가가 이어져 왔다.

하지만 삼성전자의 지난 15년 치 재무제표를 살펴보면 ‘재무통 출신 2인자’와 ‘보수적 투자’의 인과관계는 명확하지 않아 보인다. 외려 정 전 부회장 시기 삼성전자의 매출액 대비 설비투자(반도체 부문) 비율, 연구개발(R&D) 지출액 비율 등은 이전에 견줘 올랐기 때문이다.
예컨대 삼성전자의 연결 재무제표 기준 전체 매출액 대비 반도체 설비투자액 비율은 정 전 부회장이 본격적인 2인자로 활동한 2018∼2024년 평균 14.1%였다. 이는 앞선 7년간(2010∼2016년) 평균인 7.0% 대비 큰 폭으로 불어난 셈이다. 전체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비 지출액 비율 역시 비슷하다. 2010∼2016년 연평균 6.7%에서 2018∼2024년 9.2%로 상승했다. 다만 삼성전자와 달리 인공지능 메모리(HBM) 경쟁에서 승기를 잡은 에스케이(SK)하이닉스는 같은 기간(2018∼2024년) 이 비율이 10.1%로 삼성보다 높았다.
이름을 밝히길 꺼린 한 반도체 전문 교수는 “재무통 2인자 때문에 삼성 반도체가 어려워진 것이라고 쉽게 연결하긴 어렵다”며 “입체적인 판단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도 “투자 규모 자체보다 구체적인 투자의 내용과 방향 등이 관건”이라고 했다. 단순히 재무적 시각에 치우진 2인자의 편향과 소극적 투자 탓에 삼성 반도체가 위기를 겪었다고 말하긴 어렵다는 얘기다.

정 전 부회장 뒤를 이어 그룹 컨트롤타워(삼성전자 사업지원실)를 이끌게 된 박학규 사장 역시 재무통 2인자의 계보를 잇는 인물로 평가된다. 삼성전자 경리팀에 입사해 옛 구조조정본부의 재무팀 부장 및 상무보, 삼성전자 최고재무책임자(경영지원실장) 등을 지낸 까닭이다. 삼성 안팎에서 또다시 정 전 부회장 때와 같은 ‘재무통 리스크’를 염려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다만 박 사장은 “실제 재무 쪽에서 일한 건 초기의 3년여뿐”이라며 이런 세평을 부인한다고 한다. 재계 한 임원은 “박 사장이 재무통인 건 맞으나, 꼼꼼히 따져보고 한 번 방향이 정해지면 불도저처럼 무섭게 밀어붙이는 추진력이 있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삼성그룹의 미래를 전망하는 데엔 새 2인자의 ‘색깔’보단 이재용 회장의 행보가 중요하다는 관측도 많다. 이번 2인자 교체 역시 쇄신보다 기존 경영진을 다시 중용하는 안정에 방점을 찍은 만큼, 그동안 비등기 임원 신분으로 경영 전면에 나서지 않았던 이 회장이 전면에서 그룹의 주요 의사 결정을 주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창민 한양대 교수(경영학)는 “삼성 외부에서 보기에 가장 답답한 지점은 이 회장이 경영 사안에 관해 아무런 의견을 밝히지 않는 것”이라며 “이 회장이 주요 의사 결정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 명확히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종오 기자 pjo2@hani.co.kr, 권효중 기자 harr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