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회 할말이슈] 남미새는 풍자인가, 혐오조장인가?

https://supple.kr/news/cmk4szfkd00elbx7yqkumqcwd 

 

해당 기사 요약내용

 

개그우먼 강유미의 유튜브 영상 ‘중년 남미새’를 둘러싼 풍자와 혐오 논란을 다룬 기사입니다. 해당 영상은 남성 직원만 편애하고 여성 직원을 비하하는 중년 여성 캐릭터를 통해 우리 사회의 왜곡된 모성애와 내면화된 여성혐오를 풍자했습니다. 이에 대해 현실을 잘 반영했다는 공감과 특정 집단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는 혐오 조장이라는 비판이 팽팽히 맞서고 있습니다.

 

나의 경험담 

 

최근 개그우먼 강유미의 ‘중년 남미새’ 영상이 온라인을 뜨겁게 달궜다. 누군가는 통쾌한 풍자라며 손뼉을 쳤고, 누군가는 혐오라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우리가 이 논란에서 정작 주목해야 할 지점은 그 영상이 들춰낸 ‘왜곡된 관계의 문법’이다. 특히 거절을 거절로 배우지 못한 이들이 사회 곳곳에서 부리는 추태는 단순한 개그 소재를 넘어 서늘한 현실로 다가온다.

 

얼마 전 내가 살사 동호회에서 겪은 일도 그 궤를 같이한다. 마흔 살의 한 남성은 고작 세 번의 식사 후 다른 여성에게 고백을 던졌다. 그것까지는 용기라 치부할 수 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정중하지만 명확한 그녀의 거절을 그는 ‘수용’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거절당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가 보여준 미묘한 공격성, 즉 마이크로어그레션(Microaggression)은 집요했다. 그녀의 ‘아니요’를 밀당이나 수줍음으로 왜곡하고, 동호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은근히 나를 ‘사람 마음을 시험하는 예민한 여자’로 몰아가는 공기. 이는 강유미의 영상 속에서 아들을 감싸기 위해 상대 여성을 ‘쎄한 사람’으로 낙인찍는 중년 여성의 모습과 소름 끼치게 닮아 있다.

 

결국 이 모든 현상의 뿌리에는 자식을 자신의 자아로 투영해 온 부모의 그릇된 교육과, 그 속에서 타인의 주체성을 존중하는 법을 익히지 못한 ‘어른 아이’들이 있다. 아들이라는 이유로, 혹은 내 감정이 소중하다는 이유로 타인의 경계선을 침범하는 것이 용인되는 사회. ‘나는 솔로 29기 영식'의 모습이 시청자들의 공분을 사는 이유 또한, 본인의 기준을 타인에게 강요하며 상황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그 무례함이 우리 곁의 누군가와 너무도 닮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문학의 부재, 한국사회

 

인문학의 부재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나와 타인의 다름을 이해하고, 타인의 ‘거절’이 나의 ‘존엄’을 해치는 공격이 아님을 깨닫는 성찰의 결여다. 거절을 거절로 받지 못하는 남자와, 그런 남자를 ‘내 새끼’라는 이름으로 비호하는 뒤틀린 모성.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앞으로도 수많은 강유미의 풍자 속에서 씁쓸한 기시감을 느껴야만 할 것이다.

 

왜 긁혔나

 

강유미의 중년 남미새 영상에 유독 많은 이들이 긁혔다며 날 선 반응을 보인 이유는 명확하다. 그 영상이 한국 사회의 인문학적 부재가 낳은 거절을 배우지 못한 어른과 자식을 자아의 연장선으로 여기는 뒤틀린 모성의 민낯을 너무나 정확히 찔렀기 때문이다.

 

왜 그들은 그토록 긁혔는가. 그 심층적인 원인을 분석해 본다.

 

첫째로 거절을 수용하지 못하는 미성숙한 자아의 문제다. 거절을 거절로 받지 못하는 이들에게 상대의 의사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이들은 자신의 호의가 당연히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믿는 무오류의 세계에 갇혀 있다. 풍자 영상 속에서 우리 아들이 그럴 리 없다며 타인을 깎아내리는 모습은 자신의 직진이 거부당했을 때 상대를 예민한 사람으로 몰아세우며 미세한 공격성을 가하는 유치함과 정확히 일치한다. 본인의 못난 모습이 거울처럼 비치니 아플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둘째로 아들을 자신의 소유물로 투영하는 세태다. 강유미의 영상에 분노하는 이들은 대개 자식을 독립된 인격체가 아닌 자신의 트로피나 분신으로 여긴다. 아들의 무례함을 지적하는 것을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기에 아들의 가해는 실수로 포장하고 피해 여성의 목소리는 공격이라 규정한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남성은 타인의 경계를 존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

 

 

나는솔로를 보자

 

이러한 괴물 같은 자아의 단면은 나는 솔로 29기 영식의 행동에서도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상대 여성이 거절의 의사를 비쳤음에도 불구하고 내 매력을 다 안 보여줬다거나 너는 아직 나를 잘 모른다는 식의 자기중심적 태도를 고수한다. 특히 방송 중 너는 내가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식의 오만한 대화 내용은 상대의 주체성을 완전히 무시하고 자신의 기준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폭력성을 보여준다. 상황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며 끝까지 거절을 거절로 받아들이지 않는 그 무례함은 결국 뒤틀린 애정 속에서 길러진 자아의 비극이다.

 

인문학의 부재는

사회문제를 야기한다

 

인문학적 성찰의 부재가 만든 확신범들이다. 인문학의 핵심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과 자신에 대한 객관화다. 하지만 긁힌 이들에게는 이 기능이 마비되어 있다. 이들에게 상대의 거절은 존중해야 할 의사가 아니라 고쳐야 할 오답일 뿐이다. 풍자 영상에 긁힌 이들 역시 현실에 저런 사람이 어디 있느냐며 부정하지만 사실 그들은 타인에게 상처 주는 자신의 문법이 정답이라고 믿으며 살아온 이들이다.

결국 중년 남미새 논란은 한국 사회가 외면해 온 관계의 빈곤을 드러낸 사건이다. 자식을 소유물로 여기는 부모와 그 밑에서 거절을 배우지 못한 채 나이만 먹은 남성들. 이들이 풍자에 분노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쌓아 올린 견고한 자기합리화의 성벽에 금이 갔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어떻게

교육해야하나?

 

강유미의 풍자나 현실의 무례한 관계들에 분노하는 것을 넘어, 우리가 지향해야 할 교육의 방향은 명확하다. 그것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주체성을 인정하고 자신의 감정을 객관화하는 인문학적 소양을 기르는 일이다.

 

1.

첫째로 거절을 존중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거절은 나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타인의 독립된 의사 표현이라는 사실을 어릴 때부터 체득하게 해야 한다. 자신의 요구가 거절당했을 때 느끼는 좌절감을 건강하게 소화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성인이 되어서도 타인을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한 수단으로 보게 된다. 안 된다는 말을 수용하는 것도 관계를 맺는 필수적인 능력임을 교육의 핵심으로 삼아야 한다.

 

2.

둘째로 자식을 자아의 연장선으로 보는 뒤틀린 모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부모는 자식의 잘못을 무조건 비호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착각을 버려야 한다. 자식의 무례함을 실수로 포장해 주는 행위는 결국 타인의 경계를 침범해도 좋다는 위험한 신호를 주는 꼴이다. 자식을 독립된 인격체로 대하며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게 하는 교육만이 타인을 존중할 줄 아는 성숙한 어른을 만든다.

 

3.

셋째로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는 인문학적 감수성을 길러야 한다. 내가 내뱉은 말이 상대에게 마이크로어그레션으로 작동하지 않는지 끊임없이 되묻는 성찰의 힘이 필요하다. 나는 솔로 영식의 사례처럼 자기중심적인 서사에 갇혀 상대를 평가하는 오만함을 경계하려면 끊임없이 자신을 객관화하는 훈련이 병행되어야 한다. 정답을 맞히는 공부가 아니라 타인과 공존하기 위한 질문을 던지는 공부가 필요한 이유다.

 

 

결국 교육의 목표는 잘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례하지 않은 사람을 만드는 데 있어야 한다. 거절을 배운 남자와 자식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부모가 많아질 때 우리 사회의 관계는 비로소 건강해질 수 있다.

 

 

서구사회는 어떤가.

 

서구 사회 역시 인셀(Incel) 문제를 단순한 개인의 일탈이 아닌 심각한 사회적 위협이자 인문학적 결핍의 산물로 인식하고 있다. 한국의 중년 남미새 논란이 관계의 빈곤과 뒤틀린 모성에서 비롯되었다면 서구의 인셀 현상은 왜곡된 남성성과 사회적 고립이 결합한 형태다.

 

첫째로 인셀을 잠재적 테러 위협이자 혐오 범죄의 집단으로 규정한다. 미국과 캐나다 등지에서는 인셀 커뮤니티 내의 여성 혐오적 서사가 실제 강력 범죄로 이어지는 사례가 빈번해지자 이들을 극단주의 세력으로 분류하여 감시하기 시작했다. 거절을 수용하지 못하는 미성숙함이 집단적 분노로 변질되어 사회 전체를 공격하는 양상으로 번진 것이다.

 

둘째로 이들의 비정상적인 자아 비대와 피해의식을 경계한다. 서구 사회의 인셀들 역시 자기중심적 서사에 매몰되어 있다. 자신이 원하는 애정과 관심을 받지 못하는 이유를 타인의 권리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시스템의 결함이나 여성들의 잘못으로 돌린다. 타인의 주체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오직 자신의 욕망이 좌절된 것에만 분노하는 이들의 태도는 서구에서도 심각한 인문학적 결핍으로 지적받는다.

 

셋째로 건강한 남성성 교육과 사회적 연대의 회복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자식을 과잉 보호하거나 자아를 투영하는 문화 대신 타인의 경계를 존중하고 자신의 감정을 건강하게 조절하는 법을 가르치는 데 집중한다. 거절을 당하는 것이 인생의 실패가 아니라 성장의 과정임을 배우지 못한 채 온라인 커뮤니티의 혐오 서사에 의존하게 되는 악순환을 끊으려는 노력이다.

 

결국 중년 남미새에 긁히는 한국의 풍경이나 서구의 인셀 현상은 본질적으로 닮아 있다. 타인을 독립된 인격체로 대우하지 못하고 자신의 결핍을 혐오로 배설하는 미성숙한 자아들이 만들어낸 비극이다. 인문학적 성찰이 부재한 사회일수록 이러한 혐오의 정치는 더욱 기승을 부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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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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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엄마다
    남미새라는 말을 젊은친구들이 쓰는건 들어봤는데요
    이번에 자세히 알게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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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ess
      작성자
      여미새, 남미새등등 여러 신조어 부정적 단어가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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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gerJK
    풍자와 혐오 경계가 참 미묘해요.  
    그래도 거절을 배워야 한다는 지적엔 크게 공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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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민우#NSs9
     개그 소재를 넘어 서늘한 현실로 다가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