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문고서 데이트 상대 '헌팅' 잇달아…"연락처 좀"
'패션독서' 트렌드 속 SNS엔 '서점 번따 방법' 속속
"진심 같지 않아 거절"…"아무나 찾는 느낌에 기분 나빠"
서점도 '문제' 인지…'독서공간 에티켓' 안내문 등장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강민지 인턴기자 = 서점이 난데없이 '헌팅' 장소로 떠올랐다.
최근 소셜미디어(SNS)에는 대형서점을 '번따(전화번호 따기) 성지'로 소개하거나 관련 경험을 공유하는 콘텐츠가 잇따라 올라오고 있다. 서점이 데이트 상대를 찾는 '헌팅' 장소가 된 것이다.
실제 서점을 찾은 이들 사이에서도 같은 경험담이 이어진다.
'자만추'(자연스러운 만남 추구)와 독서 트렌드가 맞물린 결과라는 분석과 함께, '마음의 양식'을 찾는 독서 공간이 '헌팅' 장소로 소비되는 것에 대한 비판도 나온다.

[인스타그램 이용화면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지난달 3일 올라온 인스타그램 릴스에는 이른바 '번따 성지'로 불리는 교보문고를 찾은 여성의 모습이 담겼다.
주말 오후 4~5시께 매장을 찾은 영상 속 여성은 "재테크 코너가 번따 성지"라며 한쪽에 자리를 잡고 책을 펼친다. 화면 위로 "번호 따일 때까지 기다린다"는 자막이 뜬다. 해당 영상은 조회수 198만회를 기록했다.
같은 달 7일에는 '강남 교보문고에서 번따하는 41세'라는 제목의 릴스 영상이 올라와 조회수 103만회를 기록했다.
영상 속 남성은 매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여성들에게 "저기 혹시 연락처 좀…"이라며 말을 건넨다. 몇 차례 거절을 당한 뒤에도 시도를 이어가던 그는 네 번째 만에 연락처를 받는다.
'서점 번따 방법'을 가르쳐주는 영상도 있다.
지난해 11월 한 유튜브 영상은 "서점에서 처음 보는 여성의 번호를 따는 법부터 애프터까지"를 소개하며 "대학생이냐, 나이를 물어봐도 되냐, 혼자 자주 다니냐" 등 이른바 '번따 멘트'를 공유했다.
또다른 유튜브 영상은 "주말 오후 4시에 교보문고를 가야 하는 이유"를 거론하며 "책을 읽는 사람은 괜찮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그런가 하면 '서점에서 남자친구 있는 여성 번호 따기'를 주제로 실제 강의 실습 장면까지 담긴 유튜브 영상도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 2일 '번호 따기' 방법과 팁을 공유하는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인 일명 '번따방'에 접속한 결과, 서점을 '어프' 장소로 추천하는 대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서 '어프'는 '어프로치'(approach)의 줄임말로, 이성에게 접근해 연락처를 요청하는 행위를 뜻한다.
채팅방에서는 "요즘 낮에 어프 어디서 하냐"는 질문에 "서점에 가라"는 답변이 이어지는 등 번호를 얻기 위한 접근 장소로 서점을 권하는 답변이 올라왔다.

[카카오톡 오픈채팅방 이용화면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실제 경험담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직장인 김모(28) 씨는 4일 "지난달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외국어 교재를 보고 있는데 한 남성이 '그 책 공부하기 괜찮냐'고 말을 걸었다"고 밝혔다.
그는 "서점에서 만나는 사람은 책을 좋아하는 괜찮은 사람일 것 같아 번호를 줄까 고민하기도 했다"며 "다른 사람의 독서를 방해하지 않는 선이라면 나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체로는 이 같은 접근 방식에 불쾌감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직장인 전모(26) 씨는 "지난 1월 강남 교보문고 소설 코너에서 '번따'를 당했다"며 "같은 사람이 계속 주변을 맴돌아 시선이 느껴져 불편했는데, 몇 분 뒤 '혼자 오셨어요?'라고 말을 걸었다"고 밝혔다.
전씨는 "거절 의사를 밝혔는데도 계속 말을 이어가려고 해 무서웠고 결국 자리를 옮겼다"며 "서점은 조용한 공간이라 더 부담스럽고 도망치기도 애매했다"고 말했다.
대학생 박모(22) 씨도 "올해만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비슷한 상황을 두 번 겪었는데 서로 다른 사람이었는데도 '이 책 재밌나요?' 같은 멘트가 거의 똑같았다"며 "인터넷에서 보고 따라 하는 느낌이 강해 대화 자체가 불편하게 느껴졌다"고 했다.
또 대학생 김모(24) 씨는 "작년 12월쯤 서점에 있는데, 한 남성이 휴대전화 메모장에 '남자친구 없으면 번호 달라'는 문구를 적어서 보여줬다"며 "너무 당황스러워 자리를 피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서점이 '번따 강의'를 연습하는 장소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고 덧붙였다.
박모(29) 씨는 지난 2월 잠실 교보문고에서 책을 읽던 중 한 남성으로부터 연락처를 요청받은 경험을 스레드에 올렸다.
박씨는 지난 2일 다이렉트 메시지(DM) 채팅을 통한 인터뷰에서 "'책 읽는 모습이 아름다우셔서요'라는 말을 들으며 연락처를 요청받았다"며 "자연스럽거나 진심 같아 보이지 않아 거절했는데, 힐링을 위해 찾는 공간이 방해받는 느낌이라 불쾌했다"고 토로했다.
역시 스레드에 '서점 번따' 경험담을 올린 대학생 황모(23) 씨도 DM 채팅 인터뷰에서 "지난주 광화문점 에세이 코너에서 책을 보고 있는데 한 남성이 '지적인 분위기가 매력적'이라며 번호를 물어봐 정중히 거절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코너를 돌아 나오다 보니 바로 옆 다른 여성에게 똑같은 멘트를 하고 있었다"며 "진심으로 번호를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아무나' 찾는 느낌이라 기분이 나빴다"고 덧붙였다.

[인스타그램 이용자 'gyo_jiphap' 영상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이러한 '서점 번따' 확산에는 '텍스트힙', '패션독서' 등 독서 트렌드의 영향이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텍스트힙'이란 주로 2030 세대가 책을 읽고 기록하는 행위를 트렌디하고 개성 있는 문화로 즐기는 현상을 말한다.
'패션독서'는 책을 깊이 있게 읽기보다 SNS 인증을 위해 펼쳐두거나 사진으로 남기는 데 초점이 맞춰진, 독서를 하나의 '패션'처럼 소비하는 태도를 뜻한다.
서점이 '조용히 머무르는 공간'을 넘어 '자신을 드러내는 공간'으로 소비되면서 일부는 이를 이성 간 만남의 기회로 활용하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서점은 책을 매개로 취미와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일 것이라는 인식을 주는 공간"이라며 "사람들은 자신과 유사한 상대에게 더 쉽게 호감을 느끼고 신뢰하는 경향이 있어, 이러한 '유사성'이 관계 형성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외모가 첫인상에 영향을 줄 수는 있지만, 관계를 지속시키는 데에는 취미나 가치관 등의 유사성이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며 "서점이라는 환경이 자연스럽게 대화 주제를 만들고 관계 형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기대를 높이는 측면이 있을 수 있다"고 짚었다.

(서울=연합뉴스) 강민지 인턴기자 = 지난달 30일 광화문 교보문고에 설치된 '독서공간 에티켓' 안내판.
그러나 '서점 헌팅'이 독서를 위한 공간의 의미를 훼손한다는 부정적인 목소리가 크다.
SNS에서는 '서점 번따'를 피하기 위한 대응법도 공유된다.
지난 2월 엑스(X·옛 트위터)에는 '교보문고 번따남 대처법'이라는 게시글이 올라왔다. 작성자는 낯선 남성이 말을 걸어올 경우 "1분 안에 여자 작가 다섯 명 말해보라"고 요구하라고 제안했다.
또 지난 3월 인스타그램에는 '교보문고에서 번따 당하지 않는 호신술'이라는 제목의 릴스 영상이 올라왔다. 영상 속 출연자는 말을 걸어오는 상대를 향해 손을 내저으며 "너에게 줄 번호는 없어!", "여긴 헌팅포차가 아냐!"라고 단호하게 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서점도 이 '문제'를 인지하고 있다.
이미 광화문 교보문고 매장 곳곳에는 '독서 공간 에티켓' 안내문이 비치됐다. "소중한 독서의 순간이 낯선 대화나 시선으로 방해받지 않도록 배려해주세요.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이용이 불편하시다면 주저하지 말고 가까운 직원에게 문의해 주세요"라는 내용이다.
교보문고 관계자는 "해당 문제를 인지하고 있으며, 매장 내 '몰입의 시간을 방해하지 말아달라'는 안내문도 이를 고려해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서점은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하는 개방된 공간인 만큼 특정 행위를 직접적으로 제지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며 "다만 이용객이 불편을 느낄 경우 가까운 직원에게 요청하면 현장에서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minjik@yna.co.kr